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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에세이

우연과 운명에 대하여(1)

 


올해로 결혼한지 33년이 되었다. 그러니까 딸과 아들이 태어난지도 대충 그런 세월이 흘렀다. 돌이켜 보면 이 모든 것이 우연처럼 또는 운명처럼 느껴진다.

  


138억 년 전 우주가 빅뱅으로 탄생했고, 대강 45억 년 전쯤 지구가 생겨났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그 후, 4만 년 전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아주 현명한 인간)가 나타나서 오늘날 70억 명의 인류로 진화했다고 한다.

 

내가 오늘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우연의 우연의 우연을 수없이 반복한 결과이겠지만, 우연의 산물인 생명체가 그 우연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것도 매우 신비로운 일이다. 그 신비로움 때문에 인생이 운명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이, 이 우주에 어떤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운명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살다보면 운명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또한 느낀다. 내가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생물학적으로 진화해 왔다는 과학적 설명 앞에 나는 아직도 뭔가 낯선 느낌이 든다. 인간진화를 설명하는 과학자들은, 인간은 어떤 특정한 방향을 가지고 발전하거나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무작위로(randomly) 진화한다는 것인데, 이 사실이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더 나아가 우주는 지금 더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우리가 아직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암흑에너지와 암흑물질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인류가 발전시켜온 과학은, 인간에게 어떤 목적도 어떤 가치도 어떤 방향도 어떤 이념도 없는, 결국 아무 것도 없는 무(, nothingness)의 상태에 있다는 사실만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점점 더 황당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이 황당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요즘은 실존철학적 사유가 옳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인간의 삶에는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무한한 자유와 선택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실존주의자들의 준엄한 명령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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