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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용산참사에 대하여

용산철거민 사태에서 배워야 할 것


우리나라는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한 국가입니다. 이들 선진국 중에서 건강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나라는 일인당 GDP가 큰 부자나라가 아닙니다. 스웨덴, 핀란드와 같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소득격차가 낮은 나라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응집력을 낮추고 갈등을 심화시킵니다. 건강하고 평등한 사회는 사회응집력이 높아서 평화롭게 인간적인 삶을 누립니다. 사회적 효율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런 사회일수록 공동체생활이 활발하고, 불평등으로부터 오는 폐해가 별로 없습니다. 공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큰 스트레스와 갈등을 겪지 않습니다. 정부의 공공서비스는 오히려 시민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넓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빈부격차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데 관심을 가진 사람들끼리 클럽 같은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시민들의 정신적, 육체적 삶의 복지수준을 높여 줍니다.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공무원들이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경제적 불평등이 확대되어서는 실행할 수 없는 목표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범죄율과 폭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살던 남미의 여러 국가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커지면서, 정부의 역할이 거의 작동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갔으니까 말입니다. 남미는 지금 빈부의 격차로 인해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종교적 도덕성마저 무너졌습니다.

 

도덕성은 사회적 평등과 경제성장 중에서 양자택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 평등을 무시한 채 경제성장을 추진하면 남미와 같은 상태로 전락합니다. 경제를 성장시키되 사회적 불평등을 점차 줄이는 방향으로 성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그런 조치들을 국민적 합의로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한쪽 편의 이익을 위하여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사회적 갈등이 심화됩니다. 도덕성이나 신뢰와 같은 사회적 자본은 사회운영에 있어 윤활유 역할을 하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촉진합니다. 진정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고자 한다면, 도덕성과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이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치인들이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서 완벽하게 중립적일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부자의 편에 서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다른 이는 가난한 자의 편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래서 정치판은 크게 보면 항상 두 패로 갈립니다. 한편에서는 부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모여 보수당을 만들고, 다른 편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우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진보당을 만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당이 한나라당, 자유선진당이고, 가난한 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진보당이 민주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등입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양당체제가 굳어져있습니다. 부자들을 위한 보수당이 공화당입니다. 부시 전대통령이 일방적으로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과감하게 폈습니다. 이라크와 전쟁까지 불사하면서 말이죠. 공화당 역사에서 아마도 최악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 반대편에 있는, 오바마 대통령을 탄생시킨 민주당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정당입니다. 유럽국가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예를 들어, 독일은 군소정당들이 있긴 하지만, 크게 보면 기민당이 보수파이고 사민당이 진보파입니다. 이렇게 어느 나라든지 보수와 진보로 정치판이 갈리게 되어있습니다. 독재를 하지 않는다면, 정권은 보수당에서 진보당으로, 진보당에서 보수당으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명박씨가 가난한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샐러리맨의 성공신화를 이룩했기 때문에 적어도 서민의 아픔을 대변해 줄 수 있으리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사람들 편에서 일할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용산 철거민 참사는 그래서 발생한 사건입니다. 앞으로도 이명박 정권은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쏟아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명확한 사실을 가난한 서민들은 잘 몰랐습니다. 당장 급한 의식주를 해결하느라 다른데 눈 돌릴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보에 어둡고 설사 정보가 있더라도 그 정보의 진실을 해석할 만한 능력도 시간도 부족합니다. 광고선전의 감성적 호소에 쉽게 넘어갑니다. 빈곤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앞으로 부익부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자들도 타격을 받게 됩니다. 남미의 예를 보더라도 자본주의 자체가 위태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빌 게이츠, 워렌 버핏과 같은 양식 있는 부자들이 상속세를 낮추지 못하게 하는 등 부자들을 위한 정책에 적극 반대하고 있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자본주의 정신을 잠식하기 때문에 부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조금씩 양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부자들과 그 부자들에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있는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침몰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더욱 부자로 만들어 줄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우리나라에는 미국과 같은 양식 있는 부자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정몽준과 같은 부자들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제 와서 정책을 바꾸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보입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습니다. 남은 임기 동안 이명박 정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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