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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

2015-05-03_최근 페북에 쓴 글 모음

2015-05-03_페북에 쓴 글 모음

 

2015-05-01_[죽음에 이르는 조직의 질병]

 

무지(無知): 조직이 지금 어느 상황에 처해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지식이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그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공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무례(無禮): 자신이 맡은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더욱이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정의로운 사람으로 위장한다.

 

무능(無能): 사태의 본질과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지엽말단적인 내용에 목숨을 건다.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목전의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아주 목소리가 커서 조직 내에서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 세 가지가 조직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인 것은 무능이다. 무능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언어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런 집단은 아무리 원대한 꿈을 가진 유능한 사람들이라도 남아 있을 수 없다.


2015-05-01

 

처음에 외환은행을 론스타에게 넘긴 것이 잘못이었다.... 첫단추를 잘못 꿴 것인데...

이렇게 근본없는 것들에게 은행을 넘긴 놈들이 결국에는 나라를 이꼴로 만들고 있구나.....

공적인 사건의 소송과정을 비밀로 하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내가 법을 모른다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모든 것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만이 나라의 질서를 바로 잡는 유일한 길이다.



 

2015-04-30

 

누군가를 이기려고 하면 안 된다. 그저 옳은 일, 선한 일, 아름다운 일을 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세상엔 지는 일도 이기는 일도 없다. 승패를 가르는 패러다임이 오늘날 세상을 이꼴로 만들었다.

조직운영도 마찬가지다. 진선미를 분별하여 일했으면 되는 것이다. 원하는 결과는 반드시 따라 온다.

 

 

2015-04-26

 

[노동의 인간화를 위하여...]

 

주말 내내 독일문헌들과 씨름했다.

 

2차 대전 후 오늘날까지 독일의 노동설계(Arbeitsgestaltung)/직무설계(Job Design)의 원칙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검토했다.

 

이미 1960년대 기술발전과 공장의 자동화가 곧바로 경영합리화와 경제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때부터 인간, 조직, 기술의 상호관계에서 무엇이 문제였는지 면밀히 조사하면서 진정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생활의 인간화(Humanisierung der Arbeitslebens)을 추진해왔고, 몇 가지 설계원칙을 세워 노동과정과 노동정신의 완벽함을 추구했다.

 

완벽한 업무처리와 작업활동을 위해 끊임없이 학습을 장려하도록 직무를 설계해왔다.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담당자는 그에 걸맞는 광범위한 지식과 능력을 개발하도록 요구하고 장려했다. 미국식 hire and fire와 같은 인사정책을 거부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독일은 "인간에 부합하고 학습을 장려하는 직무설계" (menschengerechte und lernförderliche Gestaltung der Arbeit)를 해왔다. 오늘날 독일 산업계의 경쟁력은 이런 정신의 소산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주말이었다.



 

 

2015-04-20

 

[서양문명의 기원은...]

 

헬레니즘(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과 헤브라이즘(유대기독교 문명)이다. 이 둘은 서로 갈등하고 융합하면서 오늘날의 서유럽을 형성했다. 그 정신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Unus pro omnibus, omnes pro uno.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One for all, all for one.

Einer für alle, alle für einen.

 

그 본래의 뜻을 살려서 조금 길게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되었듯이, 모든 인간은 바로 그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앞절은 헤브라이즘 전통이고, 뒷절은 헬레니즘 전통이다.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가끔 묻는다. 뒷절에 나오는 바로 그 한 사람은 누구를 가르키는 거냐고 말이다. 대부분은 정확히 모른다. 아니 전혀 모른다. 모든 사람이 바로 그 한사람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했을 때, 심지어 바로 그 한 사람을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회사원들은 회사조직이나 사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이라고도 한다. 이런 대답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권위주의적이고도 자본주의적인 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은, 예를 들어 로버트 노직, 존 롤즈, 마이클 샌델과 같은 이들의 정의론을 보면, 모든 인간이 "그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했을 때 바로 그 한 사람은 "최소수혜자(the least advantaged)"를 지칭한다. 최소수혜자라는 말이 어렵다면, 그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가장 가난한 사람을 말한다. 바로 그 사람을 돕기 위해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여 헌신할 때, 비로소 사회정의가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서유럽의 지성인들에게는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있다.

 

이것은 경제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한계효용이 가장 큰 사람은 그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지원했을 때 사회전체적 효용의 합이 가장 크게 증대한다. 그러므로 가장 가난한 계층을 위해 온 국민이 헌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구현할 때, 비로소 사회정의가 실현되며, 경제적으로도 부강해진다. 서유럽의 복지국가들이 한결같이 이 정책을 써왔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것은 이 길밖에 없다. 아무튼 경제학적 설명이 어려우면 이런 얘기는 잊어버려도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를 이끄는 지위에 있는 정책결정자들은 배운 사람일수록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그들이 가진 것마저 빼앗을 궁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본론으로 가보자.

 

"한 사람이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되었듯이(유대기독교적 전통), 모든 인간은 바로 그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대 그리스로마 전통)."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일제 군국주의 전통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