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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이야기

인간을 기계처럼_프레데릭 테일러

인적자원을 합리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과학적으로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 경영학의 태조라고 할 수 있는 프레데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입니다. 아버지는 퀘이커 교도인 법률가였고, 어머니는 청교도 이민자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테일러에게는 엄격한 개신교 노동윤리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사람이었습니다. 담배와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고, 커피와 차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괜히 흥분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애는 청교도적인 삶의 전형이었습니다.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가 하버드 법대에 들어갔으나 시력이 나빠져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주물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공장노동자들이 게으르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노동자들은 주로 성과급을 받았는데, 더 많은 일을 하면 더 벌 수 있는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일하면 공장주가 성과급을 더 지급하는 게 아니라 성과급의 시간당 급료를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들에게는 이익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농땡이(soldiering)를 부렸습니다.

 

테일러의 노동윤리로서는 이런 모습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꾀부리는 노동문화는 테일러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철주야 노력해서 개인의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1주일에 6일간은 꼬박 일하고 일요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습니다. 그의 하루 일정은 새벽 5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공장에서 일하고 밤 11시까지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개인당 최고의 생산량과 표준적인 생산량을 계산해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기계의 능력을 측정하는 데 이용됐던 기본원리들을 탐구했습니다. 그가 고안한 방법은 단위 노동시간당 생산량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위시간당 작업량을 측정하기 위해서 작업을 구성요소로 세분화했습니다. 세분화된 요소별 작업을 결합하면 전체 작업이 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나중에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가 자신의 자동차생산에 응용하여 대박을 터트리게 됩니다.)

 

테일러는 노동자의 능력이 단위시간당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모든 작업과정을 규격화된 노동형태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렇게 표준화된 노동량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을 과학적 관리(Scientific Management)라고 생각했습니다. 테일러에게 있어 과학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노동행위를 계량화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10분간 정상속도로 작업한 경우와 전속력으로 작업한 경우를 구분해서 일인당 하루에 최대한의 생산량을 계산합니다. 하루 10시간 노동할 경우 최대생산량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휴식시간을 하루 일과의 40%로 계산하여 표준적인 생산량을 정했습니다. 이것은 어림짐작이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이런 방식을 공장에 적용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생산량이 전보다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성과급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실제로 받은 성과급은 전에 받았던 것보다 적었습니다. 전보다 훨씬 강도 높은 노동으로 생산량이 늘어났는데도 말입니다. 표준적인 생산량을 초과한 것에 비례하여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습니다. 초 시계로 노동시간을 재는 테일러가 원흉이라고 점차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테일러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자 했습니다. 노동에 있어서 태만과 게으름을 몰아내고 생산성을 최소한 30%이상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은 가차없이 해고하도록 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조합을 중심으로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테일러의 방식은 물질적인 기계장치가 아니라 노동자의 정신과 근육에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계장치를 때려부수는 식의 저항도 불가능했습니다. 저항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테일러의 연구성과는 소리소문 없이 퍼졌습니다. 대부분의 공장에서는 테일러의 과학적 방법에 따라 노동관행이 바뀌고 있었고, 생산성은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테일러의 연구성과는 1911년 『과학적 관리의 원칙』(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미국 경영학의 역사와 발전에 주춧돌이 되었고, 테일러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경영학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곳곳에서 초 시계를 가지고 노동자들의 작업을 통제하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만 보더라도 과학적 관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까스로 파업은 진정되었지만, 1912년 미국의회가 나서서 조사를 벌였습니다. 테일러는 의회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과학적 관리는 결코 효율적인 대안이 아닙니다. 그리고 비용을 계산하는 시스템만도 아닙니다. 이는 초 시계로 노동자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들을 평가하는 장치도 아닙니다. 이것은 노동시간이나 동작에 대한 연구도 아닙니다. … 이것은 완벽한 정신혁명일 뿐입니다.”

 

이것이 테일러의 노동윤리이자 신념이었을 것입니다. 경영분야의 작가로 이름을 떨친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는 과학적 관리방식은 위대한 통찰력이었고, 서구 사상에 미친 영향들 중 가장 지속적이고도 강력한 공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과학적 관리에 대한 강박관념은 그의 말년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잔디가 자라는 것을 관찰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완벽한 잔디를 만들기 위해 800번 이상 실험을 했습니다. 1cm2에 심겨진 잔디 잎을 늘 계산했습니다. 생애 마지막 한두 해 동안 테일러는 잔디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잔디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잔디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잔디가 자라는 공정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지칠줄 모르는 테일러의 강박관념은 인간이 아니라 노동행위의 합리화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경영학자들은 대부분 테일러의 후예로서 테일러리즘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가끔 멍청하게도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테일러가 만약 대학을 마치고 법률가가 되었다면 미국경영학은 어떤 식으로 발전했을까, 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