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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이야기

계량화가 유행병처럼 퍼지다

바나드(Chester Barnard)의 균형잡힌 조직이론과 인간 중심적인 사상은 제2차 대전의 긴박하고도 엄혹한 상황에서 제대로 꽃필 수 없었습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우선 전쟁에서 이겨야 했기 때문에 인권과 자율성, 욕망과 행복 등은 사치스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자원이나 수단으로 동원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나타난 것이 있는데, 오퍼레이션스 리써치(operations research, OR)라는 개념입니다. 영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고 운송하는 합리적 방안에 관한 연구로부터 소박하게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대전으로 말미암아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독일군의 폭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해서 각 분야의 학자들을 불러모아 레이더(radar)나 대공화기를 가장 적정하게 배치하는 방법과 전함의 적절한 배치를 연구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대서양에서뿐만 아니라 태평양 전쟁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개발된 기법들이 전후에 기업경영에 응용되어 오늘날까지 활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오퍼레이션스 리써치(OR)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공학분야에서 응용되던 것이 이제는 사회과학의 거의 전분야에서 응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OR을 의사결정을 위한 계량적 모형을 연구하는 것쯤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류혁신에서부터 테이터 트래픽까지, 서비스 퀄리티에서부터 인사배치에 이르기까지 안 쓰이는 곳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OR이 경영과학(management science)과 거의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2차 대전은 인류에서 계량화라는 정신적 바이러스를 유행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문명은 계량화에 기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계량화 없는 문명은 불가능합니다. 누가 더 정교하게 합리화된 모형으로 세계를 설명하느냐에 의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OR 또는 경영과학은 앵글로색슨(Anglo-Saxons)이 발전시켜 왔고, 그들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20세기 후반, 지구의 대부분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계량화에 뒤처진 동북아

 

이렇게 세계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동북아에서는 오랜 동안 공자와 맹자, 주역에 의지해서 통합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려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적 담론은 계량화를 천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가치 있는 삶을 추구했고, 그래서 좋은 문장과 시()를 중시했습니다. 전쟁에서 동북아 역시 앵글로색슨에게 졌습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었고 치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치욕을 만회하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그들이 추구했던 합리화의 계량화 작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가장 먼저 추구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산업을 철저하리만큼 계량화시켰습니다. 공산품의 품질에서 그 성과를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은 산업의 모든 공산품을 철저하게 계량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계량화라는 것은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계량화의 질서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베푸는 어마어마한 편익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반복하지만, 계량화란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물의 통일된 질서가 사라지면 일상생활은 매우 불편해지고 비효율적이 됩니다.

 

예를 들면, 나는 예전에 수도꼭지를 트는 방식이 서로 다른 집과 사무실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곳에서 수도꼭지를 눌러야 할지 뽑아야 할지 몰라서 번번히 실수를 했습니다. 집에서는 꼭지의 레버를 위로 올려야 물이 나오고, 사무실에서는 아래로 눌러야 나옵니다. 이상한 건물에 가면, 꼭지를 하도 기묘하게 만들어놔서 어떻게 해야 물이 나오는지를 몰라서 잠시 당황한 적이 꽤 많습니다. 도무지 질서가 잡혀있질 않습니다.

 

건물에 들어갈 때도 어떤 곳에서는 왼쪽을 당겨야 열리고, 어떤 곳에서는 오른쪽을 밀어야 열립니다. 어떤 곳에서는 왼쪽 문을 개방해놓고, 어떤 곳에서는 오른쪽 문을 개방합니다. 문을 열 때마다,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헷갈립니다.

 

우리나라의 교통신호등과 도로표지판이 정말 개판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언급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거의 모든 운전자들이 정지선을 밟고 올라서도록 유혹하는 위치에 교통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미 10여 년 전에 나의 첫번째 책 『똑똑한 자들의 멍청한 짓 한국 관료조직의 개혁을 위한 진단과 처방』에서 교통신호등의 위치에 대해 상세히 건의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관료들의 답변은 그렇게 바꾸기에는 너무 많은 예산이 든다고 발뺌을 해오면서 아직까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신호등이 운전자들을 잠재적 법규위반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울러 도로표지판 체계도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믿고 갔다가는 운전자가 반드시 낭패를 당하게 만들어놨습니다. 철저하게 합리화하고 철저하게 계량화됨으로써 질서가 잡혀있어야 할 영역인데도, 그렇게 되지 않아서 많은 불편과 비효율을 발생시킵니다.

 

혹시나 이 블로그에 쓰인 여러 글을 읽으면서 내가 계량화를 반대하는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인류의 풍요로운 삶은 계량화를 필요로 합니다. 내가 쓰고 있는 컴퓨터와 살고 있는 집은 모두 계량화에 기초해 있습니다. 계량화 없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나는 사물을 철저하게 계량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계량화 해야 할 것 vs. 해서는 안 되는 것

 

그런데, 문제는 계량화해야 할 것과 계량화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계량화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과연 인간의 정신에까지 질서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의 마음은 계량화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리 촘촘한 그물이라도 물이나 공기를 건져 올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도덕의 문제는 계량화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과 정신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짓은 인간의 정신을 억압하는 행위입니다. 누군가 말했죠, 도덕을 법률로 규제하면 억압이 된다고.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인류의 영혼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시도했던 사람들이 처참한 말로를 맞았고 문명의 쇠퇴를 가져왔습니다.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적 발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의 두뇌를 IQ로 재려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세월이 지나고 나니 얼마나 허망한 잣대였는지도 이미 잘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의 능력을 억압하는 모든 행위가 재앙을 맞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다루는 교사들에게 성과급이라는 당근과 채찍으로 그들의 마음과 행동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비도덕적이고도 반인륜적인 행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문제를 다루는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계량화의 잣대로부터 자유롭도록 해야 합니다.

 

학생들을 잘 가르치도록 유인하는 기제의 하나로 교사들에게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에 대한 등급화와 서열화 평가가 불가피합니다. 여기에서 계량화가 개입됩니다. 이런 계량화는, 그것이 아무리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교사들의 영혼과 정신을 돈에다 팔아버리는 결과를 낳게 할 것입니다. 전혀 엉뚱한 것을 계량화하고 있으며 전혀 엉뚱한 것에다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는 셈입니다. 이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교육문제와 관련해서는 추후에 별도로 논의하려고 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말이 나온 김에 교육관료들의 사고와 행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해 두려고 합니다.

 

계량화의 바이러스가 경영학을 점령하다

 

이제 다시 경영학으로 돌아옵니다. 2차 대전 이후에 전세계는 계량화의 몸살을 알았습니다. 모든 사회과학은 계량모형으로 실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학문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수학적인 또는 통계학적인 증거를 들이대지 못하면, 인정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경영학의 모든 영역도 계량화에 매진했습니다.

 

회계학이나 재무학, 경영과학 등에서의 계량화는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 분야는 아직도 계량화해야 할 미지의 영역이 많이 남아있고, 학자들은 더욱 힘을 써서 계량화의 진보를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볼 때, 회계학은 경영학의 각 분과학 중에서 가장 낙후된 분야입니다. 회계자료가 회사의 가치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정보비대칭성은 단순한 금융과 크레딧리스크(여신위험)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2007년부터 서서히 시작된 금융위기는 사실 회계학의 문제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재무제표가 기업의 가치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회계학적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회계학자들과 회계사들은 돈에 팔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자신의 앞가림이나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심지어 인사관리분야에서도 계량적 연구를 중시했습니다. 채용에서 퇴출까지 모든 인사업무의 합리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것은 계량화가 전제였습니다. 조직구성원의 정신과 영혼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 인사관리에서는 계량화에 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계량화되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고 사물화(事物化)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국식 인사관리는 과감하게 계량화를 시도했습니다. 실증할 수 있는 방법은 계량화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과관리(performance management)에서 계량화를 추진했습니다. 모든 직원들이 숫자로 표시되는 성과목표를 설정하고 그 결과도 숫자로 평가하여 숫자로 보상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숫자로 표현하도록 시도했습니다. 이런 계량화 작업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기를 맞이합니다. 성과관리를 위한 숫자들을 기업전략으로도 연결시켰습니다.모든 전략과 전략실행이 숫자의 연쇄로 엮어지도록 만들어 기업체에 팔았습니다. 그가 바로 회계학자였던 하버드대학의 로버트 캐플란(Robert S. Kaplan, 1940~) 교수였습니다. 그는 인간과 조직에 관한 체계적인 이해가 부족했던 회계학자였습니다. 그가 성과관리를 계량화함으로써 균형잡힌 성과지표카드(Balanced Scorecard, BSC)개념을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이것이 공전의 히트를 치는 바람에 그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 폐해는 심각합니다. 이것 또한 나중에 별도로 상세히 언급할 예정입니다.

 

계량화 바이러스를 저지하려고 노력한 드러커

 

제2차 대전 후에 나타난 이러한 계량화의 대세에 저항했던 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1909~2005)였습니다. 그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경영학자였습니다. 바나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드러커는 전후에 컨설턴트로서 미국의 대기업들을 관찰한 후 1954년에 불세출의 명저 『경영의 실제』(The Practice of Management)를 출간합니다. 그는 여기서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은 오늘날 읽어도 주옥 같은 내용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목표와 자율통제에 의한 관리>(Management by Objectives and Self-Control)입니다.

 

<목표와 자율통제에 의한 관리>는 그 후에 많은 후학들에 의해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왜곡이 발생했습니다. 바나드가 구성원 개개인의 직무수행과정에서 느끼는 충족감의 표시로서 사용했던 효율성 개념이, 후학들에 의해 나중에는 아예 투입대비 산출이라는 공학적 개념으로 왜곡되었듯이, 드러커의 목표관리 개념에도 많은 왜곡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목표관리(Management by Objectives, MbO)로 알려진 것입니다.

 


드러커가 생각했던 것은, 테일러리즘이 추구했던 합리화 또는 계량화가 가져다 주는 생산성은 한계에 봉착할 것이기 때문에 근로자 개개인에게 자율적으로 목표를 세워서 일하게 한다면 더 높은 동기를 부여하게 될 것이므로 오히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드러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목표관리의 주요한 공헌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명령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domination)을 자기관리에 의한 경영(management by self-control)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해준 데 있다. …… 그러나 자기관리에 의한 경영이 하나의 현실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 개념이 올바르고 또 바람직스러운 것이라는 인식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이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새로운 도구를 필요로 하고, 아울러 전통적 사고방식과 관행에 있어 광범한 변화를 필요로 한다.”

(피터 드러커, 이재규 옮김, 경영의 실제, 한국경제신문 2006, 196~197)


 

드러커는 계량화의 전통과 관행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목표설정에 있어 측정기준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매우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점이 오늘날 가장 문제시 되는 지점입니다.

 

기업의 모든 주요한 분야에 대해 분명하고도 보편적인 측정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진정 변함없는 관행으로 정착시켜야만 한다. 그런 측정기준은 엄격하게 숫자로 표시할 필요는 없으며, 반드시 정확할 필요도 없다.”

(피터 드러커, 이재규 옮김, 경영의 실제, 한국경제신문 2006, 197)


 

합리화, 계량화, 숫자에 찌들어 있던 미국인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측정기준은 숫자로 표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확할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인간은 스스로 목표를 관리할 때에만 비로소 효율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테일러리즘에 의해 계량화된 노동의 노예상태에 있던 근로자들을 자율적인 인간으로 해방시킨 사상가가 바로 드러커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드러커의 사상은 후학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왜곡에 왜곡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숫자 없는 자율적 인간에 대한 전제는 숫자로 쪼아대야 하는 타율적 인간관으로 바뀌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 숫자로 쪼아대는 것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경영으로 알고 있고, 오히려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드러커의 노력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