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장례식을 통해 죽음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분명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아직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과 그 분의 삶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돌아가신 장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함께 산 분들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나의 삶에서 부활하는 것 같습니다. 함께 산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의 삶이 나에게 끼친 심리학적인 부활이 있습니다. 체스터 바나드, 피터 드러커와 같은 경영학자들, 칼 로저스, 칼 융, 아브라함 매슬로우, 밀턴 에릭슨 등과 같은 심리학자들, 죄렌 키에르케고르, 마틴 하이데거, 칼 야스퍼스, 한스게오르그 가다머, 엠마누엘 레비나스 등과 같은 철학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내 머리 속에서 살아 있는 듯 합니다. 그들이 내 속에서 부활한 것일까요?
인간에게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죽음은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끔찍하지 않을까요? 삶은 죽음의 반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을 모르면 삶도 알 수 없겠지요. 그래서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가능한지도 모릅니다. 스탠포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였던 정신과 의사 어빈 얄롬(Irvin D. Yalom, 1931~)은 아예 “삶이 죽음의 피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빈 얄롬, 임경수 옮김, 실존주의 심리치료, 학지사 2007, 50쪽 참조)
그런 의미에서 보면, 행복도 역시 불행의 피조물입니다. 건강도 질병의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질병에 걸려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의 축복을 이해할 수 없겠지요. 자유는 속박의 경험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불행, 질병, 속박과 같은 것은 일상의 삶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체험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다른 그 어떤 체험적 속성과 다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말하고, 죽음을 상상할 수 있지만, 죽음은 결코 체험할 수 없습니다. 실존적 체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치명적 질병이나 사건을 겪으면서 죽음에 가까이 갔던 사람들을 통해 어느 정도 배울 수는 있습니다. 큰 사건이나 질병을 통해 그 동안의 삶의 자세를 진지하게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 동안 읽은 자료와 문헌들을 정리해보면, 대강 다음과 같습니다.
ü 삶의 우선순위를 바꾼다: 가치 없는 것과 가치 있는 것을 구분하고 우선순위를 명확히 한다.
ü 선택에 대한 자유를 느낀다: 가치 없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용기를 갖는 다.
ü 만물에 대해 생동감을 느낀다: 계절의 변화, 풀잎, 바람, 낙엽 등에 의미를 부여한다.
ü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더 깊은 대화를 한다.
우리는 가끔 짐승처럼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삶의 태도를 180도 바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현상을 양자적 변화(quantum change)라고 부릅니다. 아주 짧은 순간에 인간적으로 크게 성숙해지는 현상입니다. 죽음이 삶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즉,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에 뒤따르는 부활의 기적입니다.
죽음을 체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통해 성숙해지는 현상이야말로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 죽고, 매일 새로 태어나는 삶이 부활의 삶입니다.
나는 지금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섰습니다. 지금 남은 생애가 매일 부활의 삶이 되도록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앞 둔 사람처럼 삶의 우선순위를 확고히 세우지 못하고, 때로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나 자신의 모습에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나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얻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의 법칙을 깨달았습니다.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안에서 하나의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의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21~25절)
나도 내 속에는 두 개의 법이 있음을 늘 봅니다.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합니다. 그렇지만, 내 생애의 끝에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이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삶에서 바울의 신앙이 부활할 수 있기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디모데후서 4장7절)
p.s. 나의 장모상에 예상외로 많은 분들이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최동석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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