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으로, 그 후유증으로 내 마음은 다소 격정적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걱정이 커져서 그런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서민들에 대한 부담을 늘리면서 오히려 부자들에게는 세금혜택을 주고 있고, 용산참사를 아직도 방치하고 있고, 추모객들의 행렬을 봉쇄하려 하고, 보수층을 대변한다는 학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하고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 죄인으로 둔갑하는 이 세상의 불의와 부패에 대해 저항(protest)해야 할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교회 내에 모여서 가진 자들을 위한 찬송가와 복음성가를 부르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정기관을 포함한 권력의 핵심부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그들의 신앙과 생활은 이원화되어 있어 자기들끼리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여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딸이 이메일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딸의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딸은 지금 런던의 유럽계 투자은행에서 Business Analyst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번 금융위기에도 짤리지 않고 꿋꿋하게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대견하기도 하지만, 투자은행의 장래는 그리 밝지 않아 젊은 나이에 다른 업계로 옮기는 것이 어떤지 생각해 보도록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돈 놓고 돈 먹는" 투자은행의 사업모델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딸이 그런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마음이 놓이는 것은 이닙니다.
아무튼 딸 자식은, 키울 때도 귀엽고 애교가 있어서 나를 늘 즐겁게 했는데, 다 커서도 여전히 부모를 기쁘게 하는군요.
엄마 아빠
노무현 전대통령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빠의 마음이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서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번에 열흘간 휴가를 내서 뉴욕에 다녀 왔어요. 작은 고모랑 친구들도 만나보고, 뉴욕오피스에도 들를 겸해서 휴가를 냈어요. 아빠는 뉴욕에 가면 겁난다고 하셨잖아요. 나도 4년전에 처음 갔을 때는 그랬는데, 이번 여행에서 보니까 괜찮더라구요.
노란 택시, 길거리의 쓰레기들, 현란한 형광판, <브로드웨이 쇼>, <코요테 어글리>에 나오는 흥미진진한 클럽들, 게이 커플들, 건물 벽에 그려진 현란한 그림들, 센트럴 파크에서의 소풍, <섹스앤더시티>에 나오는 뉴욕의 멋진 길거리들.... 뉴욕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직접 확인하면서 뉴욕 사람들과 어울렸어요. 그러면서 나도 잠시 뉴요커가 됐었던 여행이었어요.
4년 전에 동생과 함께 왔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그 때는 그저 이곳이 신기하기만 느껴졌었는데 이번에 와서 여행했을 때는 나도 여기 사는 뉴요커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사실 뉴욕이 그렇게 멋있는 도시는 아니지만, (쓰레기와 먼지와 무서운 건물들, 그리고 시끄러운 사람들 천지인 도시지만) 나름대로의 매력이 느껴지는 도시인 것 같아요. 런던과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지는 도시예요. 런던이 여성적이라면 뉴욕은 좀 더 남성적인 느낌이 있어요.
런던은 아담하고 예쁜 집들, 특히 빅토리안 양식의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꾸불꾸불한 거리를 따라 지어져 있다면, 뉴욕은 목이 아플 정도로 위를 쳐다봐야만 꼭대기 층이 겨우 보이는 건물들이 바둑판처럼 짜인 길가에 서 있어요.(아무리 쳐다봐도 꼭대기층이 보이지 않기도 함)
런던의 길거리는 구불거려서 한 코너를 지난 다음에 뭐가 펼쳐질지 잘 몰라 새로운 길을 걷게 되면 약간 설레고, 기대되는 맛이 있는데, 뉴욕 맨하탄은 전체가 아주 시원하게 도로가 뚫려 있어서 길을 잃어도 헤맬 필요가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요.
런던에는 냄새 나는 검은 쓰레기 봉투를 길가에서 눈 씻고 찾아도 볼 수가 없는데 (검은 색 쓰레기봉투에 테러폭탄이 있을 수도 있어서 쓰레기봉투는 다 투명함), 맨하탄에는 쓰레기 국물이랑 검은 색 쓰레기 봉투가 전시장처럼 길가 중간에 버티고 있는 걸 보고 뉴욕은 더러운 도시라는 인식이 박혔었죠..
런던과 뉴욕은 또한 규모면에서도 다른 것 같아요. 센트럴 파크는 왜 그렇게 큰지, 센트럴 파크 한 가운데 서있노라면 아마도 무슨 숲 속에 와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런던은 그 크다는 Hyde Park도 한 바퀴 걸으려고 맘 먹으면 충분히 걸을 수 있는데...
레스토랑에서 서빙하는 양을 봐도 뉴욕은 평균적인 1인분 기준이 배고픈 성인 남자가 먹어야 할 양인 것 같아요. 음료수는 무슨 파인트잔 같은 데에 주질 않나, 사람들이 너무 무식할 정도로 투박하고, 낭비가 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런던과 달리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 같아요. 멀쩡하게 잘 생긴 남자 둘이 손잡고 팔짱 끼고 다니는 걸 목격한 게 한두 번이 아니고, 누가 뭘 입고 다니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요.
나는 적응력이 빠른지라, 하루는 친구가 교회에서 받은 풍선다발을 들고 뉴욕 한복판을 아주 자신감 있게 배회하고 다녔어요. 미국이 유럽보다 이혼율이 높은 것도 아마 남 신경 안 쓰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미국의 문화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유럽은 그와 달리 이혼율이 낮은 대신에 암묵적으로 부인이나 남편 말고 자기가 좋아하는 파트너를 두는 경우도 많이 있잖아요. 암튼 문화의 차이를 영미권 안에서 발견하는 것도 재미 있는 일이네요.
또 다른 아주 명백한 차이는 발음이겠죠. 미국인 친구는 내가 영국식 영어를 하면 멋있다고 하는데, 가끔은 뉴요커들이 나를 못 알아듣는 다는 사실! 늘 영국에서 했듯이, 식사를 다하고 "Can I have the bill please?" 이랬다가 "Sorry, what?"이라는 대답을 종종 들었어요. 미국에서는 check이라고 해야 하는 걸 텍사스에 있을 때도 신기하게 여겼는데 다시 한번 웃고 지나갈 일이 생겼었지요.
이렇게 남성미의 매력이 풀풀 풍기는 뉴욕이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이유를 한가지 꼽자면, 아마도 쇼핑이 아닌가 싶네요. 뉴욕은 쇼핑의 천국. 우리 회사 사무실의 여자들이 뉴욕에 주말 끼고 갔다 오는 이유 중에 한가지가 쇼핑이예요. 나는 그다지 쇼핑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은 아이템들을 영국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리바이스 청바지를 $38, Armani Exchange에서 벨트랑 티셔츠를 $25주고 샀다는 사실!) 이 맛에 뉴욕 오는 거야... 막 이러면서... ㅋㅋㅋ
뉴욕이라는 도시를 남자에 비유했는데 막상 뉴욕에는 남자가 없다는 사실! 내 친구들 얘기까지 종합해 보면 ‘뉴욕에는 한국 남자들이 별로 없다’였어요.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 가보니까 직접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진짜 그렇더라고요. 뉴욕에는 유명한 음대와 미대, 그리고 패션 디자인 학교가 많아서 그런지, 멋있는 여자애들은 넘쳐나는데, 남자들 중에서 괜찮은 사람들은 다 유부남이고... 괜찮은 남자가 뉴욕가면 대박 난다는 말도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가네요.
내가 런던에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고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원래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이어서 그렇게 얘기 한 줄 알았더니, 정말 그런가 봐요.
내 뉴욕 여행 이야기가 재미있었나요? 친구들이 찍어준 사진도 보너스로 감상하세요. 엄마 아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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