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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노무현의 죽음에 대하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3)_역사의식이 없는 자의 특징

앞에서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비전/목적/방향이 없다는 점이고, 둘째 늘 바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이 바쁜 이유는 비전/목적/방향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은폐하기 위해서인데, 오늘은 두 번째 특징인 항상 바쁘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비전/목적/방향이 없는 사람은 매사를 전략으로 승부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략이란 여러 프로젝트의 조합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실행합니다. 가능하다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 프로젝트 중에 세간에 많이 알려진 것을 예로 들면, 대운하, 영어몰입교육, 특목고 확대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 말고도 여러 잡다한 것들을 해야 하기 때문에 늘 바쁩니다. 현장을 챙겨야 하고, 매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돌아가는지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치에서는 그 현장이라는 실체도 애매합니다. 정치에서 현장이란 국민 개개인의 구체적인 삶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데나 현장이라는 데를 가서 눈에 띄는 대로 지시하고 명령합니다. 공단에 가면 전봇대를 빼야 한다, 아니다 옮겨야 한다는 둥, 기업에 가면 자전거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 아니다 자전거 길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둥. 증권거래소에 가면 주가가 얼마까지 가야 한다는 둥, 심지어 회사이름까지 바꾸는 게 좋겠다 등의 지시와 명령을 끊임없이 쏟아냅니다. 내가 보기에는 김정일의 현장지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수행원들 쭉 데리고 가서, 이러쿵 저러쿵 하면서 지시하고, 일부 충성파는 수첩 꺼내서 받아 적고, 폼 나는 장면은 사진 찍고, … 그리고 난 다음 사무관이 하기에도 쪼잔한 것들 몇 가지 지시합니다. 이런 얘기를 홍보담당자와 공보관은 열심히 받아 적어서 보도자료를 뿌립니다.

 

그래서 비전/목적/방향이 불분명한 사람은 늘 바쁩니다. 열심히 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실무를 할 때,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기업에서도 높은 자리에서는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일이 진행됩니다. 이런 것을 요즘 말로 하면, “개념 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개열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바쁜 사람을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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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김정일식 현장지도가 내가 알기로는 박정희 군사정권시대의 브리핑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 공무원들이 이런 방식에는 매우 익숙합니다. 그런데, 현장지도식 브리핑문화의 가장 큰 병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인다는 데 있습니다. 일상업무를 거의 포기하고 그 일에 매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이 일을 해보니까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지만, 높으신 분들이 방문해서 얻는 효과라고는 사진 찍는 것 외에는 별로 없습니다. 국가운영은 한 두 사람이 명령하고 지시해서 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직자들이 자신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국가운영시스템을 설계하여 잘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데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김영삼 정부시절에는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갈팡질팡하면서 비전을 잃었습니다. 요즘이 그 때와 거의 유사한 형국입니다. YS집권 후반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비전결핍을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커버하려고 했습니다. 일하면 일할수록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나라가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수록 밤샘 근무까지 하느라 그들의 얼굴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국가부도의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그래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후에 온 국민이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방향을 잃고 빙산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는데, 선장은 갑판 위를 돌아다니면서 의자를 가지런히 놓으라고 지시하고, 나사 빠진 것을 챙겨서 잘 꽂으라고 명령한다고 칩시다. 만약 여러분이 그 배에 탔다면 선장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정신차리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방향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겠어요? 제정신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습니다. '갑판 위에서 떠들고 지시하던 것을 다 집어치우세요! 그리고 배가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보세요!' 라고 말입니다.

 

나는 나의 학생과 고객들에게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비전/목적/방향의 설정이 더 우선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비전/목적/방향을 먼저 세우고 공유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숫자 같은 것은 절대로 (절대로!) 제시하지 말라고 얘기해 둡니다. 숫자는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숫자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비전/목적/방향이 불분명한 채 열심히 일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목적지가 부산인지 평양인지 모르면서 어디론가 열심히 뛰는 것은 위험한 일이죠.

 

우리는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유럽과 같은 복지화 사회로 갈 것인가? 아니면 남미와 같은 양극화 사회로 갈 것인가? 몇년 전에 남미에서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전근 온 독일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서울사무소로 발령이 나서,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달 간의 서울생활을 한마디로 이렇게 치안이 확실하게 되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남미의 도시들에서는, 해가 떨어지면 거리에 나다닐 수가 없답니다. 부자들은 저택에서 사설경비원을 고용해서 살고, 국민들의 상당수가 가난한 사람들이라서 거의 노숙자 수준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고, 강력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때로는 경찰력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나는 남미를 가본 적이 없어서 그저 상상을 할 뿐입니다. 남미는 70년대만해도 세계10대 부국에 드는 나라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20년 후에는 미국을 넘보는 초일류 부국이 될 것으로 예상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남미로 이민을 많이 갔습니다. 일본사람들도 꽤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다 남미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순희 옮김, 부키 2007)을 보세요. 장 교수는 우리사회가 왜 복지화 사회로 가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를 지향하지 않는 한, 남미와 같은 비참한 상황을 맞게 될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역사의식이 부족한 사람은, 로마 병사들이나 빌라도 총독처럼 열심히 일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했다고 해서 그 결과가 용서될 수 있을까요? 역사의식의 결여는 용서될 수 있을까요? 물론 성경의 예수처럼 우리는 그들이 무지했다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할까요? 이명박 정부의 고위층은 정말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무지하지 않습니다. 이미 수많은 현상분석과 대안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들은 비교검토했고, 철저히 손익을 따져보았습니다. 역사의식의 결여와 그로 인한 비전/목적/방향의 결핍을 은폐하기 위해 여러가지 잡다한 프로젝트를 하느라 바쁩니다. 그 프로젝트 하나하나를 면밀히 따져보고 그 전체적인 기조를 보면, 결국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몫을 부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명백해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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