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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노무현의 죽음에 대하여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1)_역사의식의 결여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는 골고다 언덕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는 이처럼 자신을 죽인 그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예수가 죄수 두 명과 함께 처형되는 현장에 있던 로마 병사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죄가 없었던 예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고,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고, 병자를 고쳐주었고, 죽은 자를 살렸고,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율법은 위선을 조장한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위선의 기도를 올리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예수의 가르침은 당시 유대세계에 비교적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 병사들은 예수가 죄 없다는 그 명백한 사실을 어째서 알지 못했을까요? 병사들이야 무식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를 심문했던 빌라도 총독은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십자가 처형에 내맡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역사의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식인 계급에 속했던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예수에게 찾아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유대사회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는 예수의 비범성을 알아보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을 깨지 못했습니다. 유대땅을 다스리는 높은 지위에 있었고 거기서 벌어지는 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예수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헤롯왕을 비롯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협하는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거침없는 가르침과 진실폭로에 겁을 먹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권력자들의 역사의식의 결여. 이것이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몰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식이란 무엇인가?

 

역사의식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한 성찰에서 비롯됩니다. 말하자면, 역사적 존재로서 자각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의 결핍은 사회적으로 많은 위험과 위기를 초래합니다. 최근에 겪은 대표적인 사례가 부시의 이라크 침공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통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시는 세계사적 역사의식의 결여로, 박정희는 민족사적 역사의식의 궁핍 때문에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부시나 유신시대의 박정희와 같은 사람들의 특징은 비전/목적/방향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공유된 비전/목적/방향이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만들어 공유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리석게도 자신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 또는 사회가 그것을 원할 것이라고 짐작되는 것을 힘으로 밀어 부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다른 부분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고, 내 분야에서만 본다면 경영학은, 20세기 초반, 숫자로 쥐어짜던 제1세대 경영학(Taylorism)에서, 20세기 후반,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던 제2세대 경영학(Druckerism)을 지나왔습니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부터 제3세대 경영학(Wholism)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조직과 조직구성원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구성원 개개인은 구분되는 독립체인 것이 분명하지만, 어떤 조직에 소속되면 그 조직의 전체가 되어 버린다는 말입니다. 개체가 전체요 전체가 곧 개체인 상태입니다. 개개인이 조직의 전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낱개로 찢어진 존재가 아니라 낱개의 특성을 보존한 채 따뜻하게 연결된/뭉쳐진 공동체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공동체를 구성할 때, 비로소 높은 성과를 낸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미국식 경영학의 폐해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현정부의 경영방식은 제1세대 경영학에 속하는 계량화에 의한 명령과 통제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 가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떤 실용적 기술을 활용해야 하는지도 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하지만, 현정부에서는 이런 고민의 흔적을 거의 발견할 수 없습니다. 속도전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온갖 과오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역사의식의 결여를 힘의 실용적 활용으로 커버할 수 있을까요? 힘의 활용과정에서 겪는 무수한 고통과 희생을 우리는 그저 감수하고 있어야 할까요? 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을 힘으로 밀어 부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가 가르쳤던 것처럼, 힘을 쓰는 사람은 결국 힘으로 망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이런 의문들은 흥분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촛불을 든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촛불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효과가 있긴 하지요.) 온 국민의 깊은 사색을 필요로 합니다. 사색은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기간의 훈련을 해야만 사색이 가능합니다. 역사의식은 사색을 통해 싹틉니다. 사색의 훈련이 없이 오로지 손익만 계산해 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역사의식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