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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에세이

조직이란 무엇인가

'조직이란 무엇이다'라고 많은 학자들이 정의해 놓았지만, 여느 개념정의와 마찬가지로 조직에 관한 정의도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직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정의하기 때문입니다. 정의마다 각각 나름대로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내리는 정의 또한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앞으로의 지속적인 논의를 위해서 우선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관점에서 조직을 정의해 두고자 합니다.

정태적 관점 : 원하는 성과를 창출하기 위한 협동체계

동태적 관점 : 행위영역의 선상황적(先狀況的) 규정화
                     (praesituative Regelung der Aktionsfelder)


조직이란 여러 사람이 모인 하나의 개념적 실체(conceptual entity)인데, 이것이 어떻게 유기적인 움직임을 통해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해명하는 것은 단순한 조직이해를 넘어 더 좋은 조직을 설계하고, 더 바람직한 조직문화를
 형성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따라서 조직이해는 정태적 관점보다는 동태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유용합니다. 정태적 관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반화된 정의지만, 동태적 관점은 좀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조직에서는 대개 구성원들이 직면하는
 여러 상황에서 어떻게 의사결정할 것인지를 미리 정해둡니다. 미래에 동일하거나 유사한 상황이 발생하면 효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하기 위해서죠. 예를 들어, 나는 아내와 결혼한 후에 매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아내와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의사결정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역할과 책임이 나누어져 있어서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즉 이미 결혼한 상태를 바꿀 의사가 없는 한 매일 똑같은 결정을 위해 서로 상의하며 토론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가정도 하나의 조직으로서 동태적 관점에서 보면 부부의 역할이 선상황적으로 규정화되어 있기 때문에, 매일매일 똑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를 서로 상의하지 않아도 무난한 가정경영이 이루어집니다.


기업상황에서 조직구성원들의 행위가 선상황적으로 규정화되는 예를 찾아보면, 회사 내에는 취업규칙에서부터 직무전결규정을 거쳐 사우회 규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규정들이 있다.
 바로 이것을 선상황적 규정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직구성원들이 향후 당면할 행위영역에서 어떻게 의사결정 해야 할지를 미리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규정대로 의사결정을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직운영의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직(organization)은 조직구성원들의 행위를 미리 정하여 놓은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정하는 과정을 조직화(organizing, Organisierung)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어의 organization은 희랍의 오르가논(organon)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인데, '오르가논'은 수단 또는 도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직은 그래서 더 많은 성과를 창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수단 또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더 많은 성과를 창출하기 위하여 구성원들의 행위가 선상황적으로 규정화 되고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조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 규정이 명문화 되어 있건 암묵적으로 실천되고 있건 상관없습니다.


오늘날 조직은 인간이 바람직한 삶을 영위하는 데 매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직이 올바른
 규정화 작업을 통해서, 그것이 제도적 장치가 되었든 아니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프로그램이든간에, 제대로만 조직화된다면 우리는 훨씬 더 좋은 사회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조직의 개념을 길게 설명하는 이유는, 조직이라는 개념적 실체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을 미리 확고히 해 두기 위해서입니다. 조직이 인간의 삶을 옥죄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조직의 쓴 맛을 보아야 한다"는 시쳇말은 사실 조직을 조직구성원보다 상위의 우월한
 인격적 실체로 잘못 보기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조직을 전체주의 또는 집단주의적 발상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은 수단이기 때문에 수단에 불과한 조직이
 그 조직의 목적인 인간에게 쓴 맛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망치가 목수에게 쓴 맛을 보여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어불성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직의 쓴 맛"에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조직은 다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 체념하고 맙니다. 사실은 조직이 그런 것이 아니라 조직 내의 상사가 그렇게 쓴 맛을 주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조직은 조직구성원들의 삶에 봉사하는 개념적 실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