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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에세이

어머니 장례식을 마치고...

어머니 장례식을 마치고...

 

가까운 친척과 친한 친구들을 모시고 간단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저는 관혼상제에 관한 기존의 관습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가족끼리만 장례를 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관혼상제를 만날 때마다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할 수도 없고 사회적 관행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지인 몇몇 분에게 모친상을 알렸습니다.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행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관행을 따를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조문해주신 분들께는 여기서라도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런던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2015730일 페북에 어머니의 상태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죽음은 항상 삶의 일부분이다한국에서 "어머니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병원 의사로부터 위독 메시지는 금년 들어서만도 여러 번 받았다.

 

1920년대 일제시대에 태어나 초등학교를 일본어로 공부하고 해방이 되었지만 전쟁을 겪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여 아이들 넷을 낳았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시절의 대부분을 일제식민시대에 보냈지만, 나는 한번도 어머니가 일본어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자식들 모두 대학교육을 시켰고... 어언 90년의 생애를 거의 한결같이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사셨다.

 

아주 오래전 유학중에 어머니가 잠시 독일에 오셨는데, 독일의 여러 명승지를 구경시켜 드렸다. 내가 독일 명승지를 어떻게 해설하겠는가... 여기가 어딘데 그냥 경치만 구경하시라고, 중세의 건축물들이 이딴 식으로 생겼다고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에서 어머니가 관광객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일본인 단체관광객 가이드의 설명을 따라 나서신 것이다. 나중에 겨우 만나 연유를 물으니 일본어가이드의 설명이 감동적이라는 얘기였다. 일본가이드의 설명이 훨씬 알찼고 재미있었으며 나의 안내가 영 시답잖았던 것이다.

 

당시 내가 놀란 것은, 어머니의 귀에 일본어가 잘 들렸다는 점이었다. 해방 후 한번도 일본어를 쓴 적이 없을 텐데도... 비록 강원도 시골 일제시대였이지만, 어머니가 마을에서 뛰어난 총명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를 친지와 지인을 통해 여러번 들었다. 그럼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진학을 하지 못하고 가사를 돌보다 결혼한 것이다. 시대를 잘못 만나 기구한 삶을 사신 것이다. 스스로는 극복할 수 없는 시대적 운명이었다.

 

이렇게 한 세대가 마무리 되는 것이다.

 

이제 그런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 자식들 세계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타고난 재능을 맘껏 발현할 수 있는 교육철학과 경영철학이 정립되고 이것이 우리 사회의 모든 제도에 스며들어야 한다.


그리곤 201584일에는 페북에다 다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때만해도 어머니는 예전처럼 굴곡이 있겠지만 살아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것은 금년 들어서만도 여러 차례 있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이전과는 양상이 다르다면서누님은 내가 빨리 귀국했으면 한다고 했다임종을 위해 누님은 병원 옆에 모텔을 구해 왔다갔다 하고 있다면서 상황의 시급함을 알려 왔다휴대폰 저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다소 떨리고 있었다.

 

급히 비행기표를 구하느라 애를 썼는데 마침 내일 오전에 출발하는 표를 구했다...이렇게 급히 구하는 표는,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표현으로 하자면, 졸라 비싸다.

 

형수님으로부터 문자가 다시 왔다. 의사가 누님더러 모텔에 계실 필요 없이 그냥 집에 가 계셔도 된다고 하면서... 둘째 아들 얼굴을 못 봐서 돌아가시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단다...... 의사 말대로라면, 내가 귀국하면 어떻게 된다는 건가? 비행기표를 다시 취소해야 한다는 건가?


201586일 병원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10분이었습니다. 누님과 매형이 병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도착했을 때는 호흡과 맥박이 조금 낮은 상태였고 어머니가 우리를 알아보지는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오후에 들어서면서부터 심호흡을 계속 하시더니 기계장치들에 연결된 모니터의 그래프도 점차 굴곡이 낮아졌습니다. 편안한 표정이었습니다. 오후 416분부터는 굴곡이 아예 사라지고 그래프는 일자형을 그리며 옆으로 누워버렸습니다. 신체에서 아무런 전기적 신호가 발생하지 않는 의학적 사망의 표지였습니다. 의사는 마지막 점검을 했습니다. 허리를 숙여 어머니 눈꺼풀을 뒤집었고, 볼펜에 달린 불빛을 비추어 자세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두 눈의 눈꺼풀을 쓰다듬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하는 마지막 인사 같았습니다


의사의 말대로 아들얼굴을 보자 편안한 마음으로 곤히 잠드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죽음이 닥쳐오는 겁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가능합니다. ()가 곧 존재의 근거가 된다는 장 폴 사르트르의 사상은 죽음이 곧 삶의 근거가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삶의 의미를 발생시킵니다. 만약 인간에게 죽음이 없고 현재의 삶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삶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돈과 권세와 명예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헐뜯으며 아귀다툼하는 세상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삶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4년 전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급히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생명을 건졌지만, 의식을 거의 잃은 상태였습니다. 의사, 간호사, 간병인의 24시간 관찰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와상환자로 삶을 버텨왔습니다. 인생의 끄트머리에 생명을 연장하는 의술에 의지하면서 생물학적으로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삶을 사신 것입니다.

 

어머니의 장례를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애써주신 친척과 친지들, 그리고 장례의 모든 일정을 이끌어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