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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

트랜스크리틱_꼬뮨이 가능할까?


서구 계몽주의 사상가로서 이성 중심의 모더니즘을 가능케 했던 칸트와 서구적 공산주의 사회를 기획한 맑스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일본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인류공동체를 구현하려고 시도하는 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가 바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입니다.

최근에 그의 책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을 읽고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놀라운 구절이 있습니다.




다시 덧붙이자면, 상인자본이 공간적 가치 체계의 차이에서 잉여가치를 얻는 것에 비해, 산업자본은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체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잉여가치를 얻는다. 그런데 잉여가치를 어디서 얻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컨대 19세기 영국의 산업자본은 독일에서 매입한 면을 기계로 생산하여 그것을 다시 독일로 수출함으로써 이윤을 얻었다. 그 잉여가치는 독일과의 가치 체계의 차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독일의 수공업을 파괴시켰고, 반대로 원료인 면화 생산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산업자본은 원료만이 아니라 노동력이 더 싼 곳을 찾아 이동한다. 국내의 임금이 상승하면 기업은 외국으로 공장을 이전하고 값싼 노동력을 얻는다. 다시 말해 자본은 항상 차액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얻음으로써 자기증식하고, 그 차액이 어디서 나오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산업자본주의 경제에서도 상인자본의 활동은 주식이나 환율을 둘러싸고 차액이 발생하는 모든 지점에 존재한다. 이러한 상인자본 활동의 편재가 부동(浮動)하는 가격을 균형상태에 가깝게 만든다. 그럼에도 산업자본을 특징짓는 것이 기술 혁신에 의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창출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경제학자들은 전 지구적인 금융자본의 투기가 실체 경제를 벗어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그 경제학자들이 잊고 있는 것은 실체 경제역시 텅 빈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본제 경제라는 사실이다. (407)


 

이 얼마나 탁월한 통찰인가! 자본제 경제라는 것이 실물생산이 아니라 '텅 빈' 금융자본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음을 이미 간파했습니다. 고진은 인간이 연합을 통하여 세계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그런 기획이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힘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칸트가 생각했던 인간의 이성은 그렇게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못될 뿐만 아니라, 맑스가 추구했던 공산적 사회 구상 또한 인간의 불완전한 감정, 특히 탐욕의 분출을 무시했기 때문에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과 감정을 넘어선 그 무엇으로 연대(association)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고진이 구상하고 있는 강력한 연대(New Associationists Movement)를 구축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공통된 신앙 또는 영혼의 울림 같은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