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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

한국교회에 벼락같이 떨어진 축복(1)

요 며칠 사이 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옥성호의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 경영학,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한국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특히 대형교회들의 탈선은 심각한 정도를 넘어 스스로는 정화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교인숫자로 경쟁을 벌이는 모습은, 마치 시장에서 고객만족을 위해 싸우는 기업경영의 현장을 보는 듯합니다. 복음은 사라지고 고객만족을 위한 경영효율화가 교회운영의 원리로 자리잡았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구절을 세속적인 성공의 법칙으로 포장하여 가르치는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교회재정은 블랙박스처럼 운영되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불법적인 비자금을 조성하여 정치권에 로비하는 것처럼 교회도 정치권력이나 정치이념과 결탁하여 정치권에 로비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겉에서 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겉이 화려한 만큼 그 속은 타락해가고 있습니다.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은 한국의 대형교회들을 더 이상 기독교로 인정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정직하게 설명한 책을 읽게 되었으니, 내가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옥성호가 쓴 다음과 같은 책을 읽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드디어 스승을 만났다

아버지와 아들

내가 꿈꾸는 교회

 

저자는 탄탄한 독서력을 바탕으로 크리스천으로서의 고백을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작들을 읽으면서 한동안 깊은 감회에 젖었습니다. 내가 기독교를 바라보는 입장과 너무나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이 겪는 일반적인 경험을 때로는 차분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써 내려간 글들이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나는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은 이미 맛이 간 상태라고 진단해 왔습니다. 물론 소형교회라고 해서 다 옳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형교회들의 폐해가 극심하기에 특히 대형교회를 언급했을 뿐입니다. 소형교회들도 대형교회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 하면서 교인숫자와 교회재정을 늘리기 위해 기를 쓰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반복음적(反福音的)인 행태는 비기독교인들에게조차 빈축을 살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런 행태는 우리가 다 잘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는 옥성호의 첫 저작인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교회는 심리학이라는 학문영역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복음과 비복음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성도들이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을 밝혔습니다. 이점에서 옥성호의 분석은 탁월합니다.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해괴망칙한 이름 아래 심리학이 기독교를 점령해버린 현상을 지적합니다. 기독교 물리학, 기독교 생물학, 기독교 수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존재할 수 없듯이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데 비극이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복음의 능력으로 충분합니다.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각종 세속적인 학문의 권위를 빌어서 복음의 부족함을 보완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이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과 심리학을 혼합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독교 심리학자들은 ... 자신들이 공부한 심리학 이론에 맞추어 성경을 적용하려니 당연히 성경말씀을 심리학 이론에 맞추어 왜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무서운 함정이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정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혼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갖다 섞어 버림으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모르게 되는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결과 결국 진짜도 없고 가짜도 없으며 보기에 따라 아무렇게나 다 해석되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98~9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들은 심리학에서 가르치는 각종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나 리더십 스킬 강좌를 개설해서 심리학 이론에다 성경구절로 포장하여 워크숍과 세미나 형식으로 교인들에게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성경을 이용하여 세속적으로 성공하는 비법을 가르칩니다. 이런 현상은 복음의 능력이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세속적인 학문의 성과를 혼합하여 복음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잘되는 나』와 같은 연설집(감히 설교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을 금과옥조로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따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국교회에는 지금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자의 이런 분석은 지극히 타당하고 이런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한국교회의, 특히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물리학이 자연의 물리적 현상을 연구하듯이 심리학이라는 세속적 학문은 철저하게 인간의 심리현상을 연구합니다. 마음의 문제가 바르게 정립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융의 분석심리학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하는 이상행동의 치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최면치료도 이상심리의 치료를 위한 일환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작용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함으로써 독자적 학문영역으로 성립되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뇌과학의 발달로 심리작용과 뇌세포 연결망(neural wiring)의 상관관계를 연구함으로써 반사회적 행동뿐만 아니라 건강한 정신활동의 강화를 위한 연구결과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연구결과들은 실제로 매우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말한 대로 심리학이 종교, 특히 이단 종교인 것처럼 언급한 것은 조금 과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기독교가 심리학에 대해 뭐라고 평가하든 말든 심리학자들은, 물리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연구성과를 축적해 나갈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인으로서 저자의 심리학에 대한 이해에는 그 나름대로 충분한 일리가 있고 나도 공감합니다. 교회에 심리학이 스며듦으로써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져 가는 현상이 너무나 안타깝기 때문에 기독교의 정통교리를 변론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리학 탄생의 역사적 배경까지 설명하면서 심리학이 학문일 수 없고 종교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과격하면서도 매우 새로운 관점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심리학이 교회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력을 감안한다면, 심리학은 마귀의 학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은 기독교의 정통 교리체계와는 아무 상관없이 환자들을 치료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물리학의 연구성과가 기독교 교리체계와 다르다고 해서 물리학이 마귀의 학문이라고 할 수 없듯이, 심리학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몰지각한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심리학의 치료효과를 복음으로 인식하여, 심리학을 복음으로 대체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학문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과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en)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전에는 하나의 학문으로서만 존재하던 것이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는 크게 둘로 갈라졌습니다. 이 둘은 그 학문방법이 서로 다르게 분화하여 발전되어 왔습니다. 자연과학은 엄밀한 실증성을 요구합니다. 학문의 이런 분화가 거의 없던 시절에는 과학적인 연구결과들이 기독교의 교리와 충돌해 왔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런 실증된 자연과학적 지식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은 이제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적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과학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신비주의적 환상에 불과하게 될 테니까요.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듯이, 각종 신비주의적 환상에 빠진 사람들의 말로는 그 환상만큼이나 참담합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자연과학적 지식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과학적 지식이라 해도 우리는 항상 겸손한 자세로 접근해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정신과학의 연구결과를 기독교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습니다. 근대학문으로 발전한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은 인간의 정신문제와 그 결과를 다루도록 발달해 왔기 때문에 항상 기독교 교리와 긴장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물론 자연과학도 예나 지금이나 불편한 면이 있지만,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조금씩 확장하면서 자연과학적 연구성과를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정신과학(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포함하는)은 기독교 정신의 발현과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적인 정신과학과 기독교 교리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더구나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세계에 직접적이고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인간의 죄성과 회개, 구원과 영생의 교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이 우주의 존재목적과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한 해석체계가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완전히 새롭게 태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작용과 행동체계가 달라집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과는 확연히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심리학은 학문으로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실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영성을 추구하는 일파들이 심리학을 빙자하여 영혼을 구원한다고 과장한다면, 학문의 영역을 넘어선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류를 제외한 심리학은 사회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마음의 구조를 정비해 주는 데 좋은 공헌을 하고 있고, 그것은 항상 검증 가능합니다. 하지만, 복음의 능력은 영혼의 구원에 충분하기에 심리학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일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이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아무튼, 한국교회가 심리학과 교리를 구분하지 못하고 이 둘을 혼합하여 마구잡이로 세속적인 성공의 비법을 가르쳐온 데 대한 저자의 비판을 우리는 심각한 자세로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옥성호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별 다섯개로도 부족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면죄부를 팔던 중세교회만큼이나 희망이 없어 보이던 한국교회에 벼락처럼 떨어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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