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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

심리의 세계에서 물리의 세계로

지난 해, 그러니까 2008년은 물리의 세계로 여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소득이었습니다. 내 손을 거쳐간, 양자이론에 관련된 책은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열거한 문헌을 통해 심리의 세계에 푹 빠져있던 내 사유의 한계를 우주 전체로 확장할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얻었습니다. 나로서는 더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올해도 작년과 같은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엘레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우주의 구조, 브라이언 그린

평행우주, 미치오 카쿠

숨겨진 우주, 리사 랜들

최종이론의 꿈, 스티븐 와인버그

홀로그램 우주, 마이클 탤보트

프로그래밍 유니버스, 세스 로이드

춤추는 물리, 게리 주커브

신의 입자를 찾아서, 이종필

 

아무튼 이런 책들의 내용을 내가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이래로 한번도 제대로 된 물리학 책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리현상의 수학적 진실을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얻은 소득이 있다면, 물리의 세계와 심리의 세계는 근원적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근원에 대한 탐구는 항상 철학적 사유에 기반합니다. 그것이 물리든 심리든 말입니다. 지극히 실용적인 학문인 경영학도 그 깊은 뿌리는 철학입니다. 철학은 끊임없이 존재와 인식을 다룹니다. 실용적인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이슈들도 그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념의 문제, 인간관의 문제, 정신의 문제, 철학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거시의 세계는 고전물리학으로 수학적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계로 들어가면 고전물리학은 전혀 통용되지 않습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의 물리학인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역학이란 물체의 운동성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양자의 운동을 예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물리학의 지식으로는 양자운동의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데 고민이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양자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양자의 행태는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입자(particle)일수도 있고 입자가 아닌 파동(wave)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입자이면서 파동인 상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양자역학은 놀랍게도 철학적 사유에 닿아있습니다. 아니, 이 우주는 인간의 철학적 사유를 훨씬 넘어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이 아주 많기 때문에 양자역학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양자역학은 이론적으로 기본입자(elementary particle)를 상정하지만, 그 입자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며, 전체 속의 다른 사물을 향해 뻗어 있는 일련의 관계를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모든 입자는 소위 파동함수(wave function)로만 설명됩니다.

 

입자들이 파동함수로 설명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일반인들은 파동함수라는 수학적 용어에 질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뉴욕시립대 물리학과 석좌교수인 미치오 카쿠(Michio Kaku)가 쓴 『평행우주』에 나오는 친절한 예를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무를 나타내는 파동함수는 나무가 서 있을 확률과 쓰러질 확률을 구체적인 수치로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지만, 어떤 나무가 쓰러질 것인지, 아니면 서 있을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나무는 서 있거나, 아니면 쓰러져 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서 있으면서 동시에 쓰러져 있는나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파동의 확률과 상식적인 존재 사이의 차이점을 해결하기 위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내세웠다. “파동함수가 외부의 관찰자에 의해 관측되면 단 하나의 값으로 붕괴된다.” 다시 말해서, 이런저런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던 파동함수가 관측이라는 행위에 의해 단 하나의 값(관측결과)으로 단순화된다는 것이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나무는 서 있는 상태와 쓰러진 상태가 파동함수 속에 공존하고 있지만, 누군가가 나무를 바라보는 순간에 단 하나의 상태(대부분은 서 있는 상태)로 결정된다. 이 논리에 의하면 관측행위는 입자의 상태를 결정한다. 과거의 물리학자들은 입자의 상태가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것을 확인하는 행위가 관측이라고 생각했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관측이라는 행위 자체가 물체의 상태를 결정한다. 입자를 바라보는 순간에 입자의 파동함수는 붕괴되고, 그 순간부터 입자는 명확한 특성(관측자가 알고자 했던 특성)을 갖게 된다. , 관측이 일어난 후로는 더 이상 파동함수로 입자를 서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파동함수의 특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책상, 의자, 볼펜 등과 같은 거시적 사물들은 시공간에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내가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 각각의 독립된 경험적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현대과학은 이런 물질들을 쪼개고 쪼개서 미시의 세계로 들어가 그 궁극적 본질을 알고 싶어 합니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원자(atom) 수준을 넘어서 아원자 수준(subatomic level)의 입자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수준의 입자들은 독립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서로서로 얽혀 있어서 분리되지 않으면서 물질인 것 같기도 하고 비물질인 관념인 것 같기도 한 상태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더욱 신비로운 것은 입자들이 단순히 얽혀 있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다른 입자의 결정을 즉각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마치 입자에 의식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멀리 떨어져 있는 입자가 다른 입자의 결정을, 그것도 동시에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든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아원자 수준의 입자들은 파동의 성질을 띄고 있는 입자, 즉 독립된 입자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게리 주커브(Gary Zukav)는 자신의 책 『춤추는 물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부 생물학자들은 한 개의 식물세포는 그 안에 모든 식물을 재생시킬 수 있는 능력을 담고 있다고 믿는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의 철학적 뜻은 이렇다.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우주만물(인간을 포함해서)은 실제로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나의 유기적 무늬(organic pattern)의 일부이며, 그 모형의 어느 부분도 전체에서, 또는 상호간에 분리될 수 없다.


 

이것이 과학적 진실이라면, 이 말의 경영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조직이란 얽혀있는 유기적 전체(entangled organic oneness)이기 때문에 조직구성원을 개별적이고도 독립된 개체로 분해하여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개별적으로 독립된 각각의 구성원으로 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그 이면에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 또는 얽혀 있음(entanglement)의 기본원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영자들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에 관한 물리학적 철학적 배경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점증하고 있는 요즘 경영자들은 구조조정으로 조직구성원들을 잘라내야 하는 결정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기업을 살리는 길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성장이 멈추었다고, 아니 마이너스 성장을 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불안과 공포를 조성할 것이 아니라, 조직구성원들에게 경영자로서 분명한 경영철학적 메시지를 보내야 할 때입니다. 이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우리 회사는 아무도 잘라낼 수 없다고…, 그래서 우리 회사는 조직구성원들끼리 더욱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그것이 우주의 기본 질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