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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

신은 죽었다. 도대체 누가 죽였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동안 썼던 교과서를 주섬주섬 모아서 시내 헌책방에 갔습니다. 그걸 팔아서 읽고 싶은 다른 책을 사려는 심산이었습니다. 마침 눈에 띄는 전집이 보였습니다. 5권짜리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니체 전집』이었습니다. 내 눈에 유독 니체라는 단어가 띈 것은 아마도 학교에서 니체라는 철학자가 신은 죽었다고 과감하게 선언했다는 말을 배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신이 죽다니? 죽을 수 있는 신이라면 신이 아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닌가?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시골교회에서도 니체에 대해 뭐라고 가르쳤는데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마귀 사탄의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거나 눈에 들어온 『니체 전집』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남은 단어는 짜라투스트라가 어쨌다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사탄이 하는 말은 정상적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서울로 온 후에도 그 전집을 계속 끌고 다녔는데 안타깝게도 이사 때 분실되었는지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아까운 전집 중의 하나입니다. 니체가 했다는 그 말이 내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지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영학을 공부했습니다. 경영학이 먹고 사는 데 조금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무지 니체를 읽을 틈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에 책세상 출판사에서 21권짜리 『니체 전집』이 완간되었습니다. 덕분에 요즘은 가끔 니체를 읽습니다.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 문장은 1882년에 출간된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에서 세 번 나옵니다. 여러분도 한 번 읽어보시지요.

 

108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방식이 그렇듯이, 앞으로도 그의 그림자를 비추어주는 동굴은 수천 년 동안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그 그림자와도 싸워 이겨야 한다! (183)


 

125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우리가 대양을 마셔 말라버리게 할 수 있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지우개를 주었을까? ……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어떤 물로 우리를 정화시킬 것인가? 어떤 속죄의 제의와 성스러운 제전을 고안해내야 할 것인가? 이 행위의 위대성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그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없었다. 우리 이후에 태어난 자는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떤 역사보다도 더 높은 역사에 속하게 될 것이다!” (200~201)


 

343

근래의 최대의 사건은 – “신은 죽었다는 것,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한 믿음이 믿지 못할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 이 사건은 이미 유럽에 그 최초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드라마를 꿰뚫어 볼 만큼 시력과 의혹의 눈길이 충분히 강하고 예민한 소수의 사람들은 하나의 태양이 지고 있으며, 오래된 깊은 신뢰가 의심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319)


 

건성으로 읽지 말고 다시 한번 더 찬찬히,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면서 읽는다면, 니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해가 1882년이니까, 이 해를 기점으로 근대를 넘어서 현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줌(Cogito, ergo sum)의 방법서설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했을 때, 근대 문명은 1637년에서 1882년까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약 250년간 이성중심의 서구 근대문명이 형성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근대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이성중심의 세계관을 서서히 받아들인 교회가 세속적 권력을 얻어가면서 함께 타락했고 부패해졌습니다. 그 결과 권력의 맛을 알았던 교회와 이성중심의 신학이 신을 죽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가 신의 무덤이 된 셈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타락과 부패를 보면 니체의 말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거의 사라진 세계, 즉 신이 아닌 인간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로 스위스에서 라브리(L’Abri)공동체를 창설해서 2대전 후 절망에 빠진 유럽 젊은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대해 가르쳤던 분이 있습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August Schaeffer, 1912~1984) 박사인데, 그 분의 견해대로 인류는 절망의 선(line of despairs) 아래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근대문명은 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패러다임을 확립했습니다. ‘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정직하게 말했을 때, 오로지 욕구와 욕망과 탐욕의 덩어리입니다. 이것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됨은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라고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의 이성은 매우 취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성은 욕구와 욕망과 탐욕의 덩어리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욕구는 생리적인 것이지만, 욕망은 그것을 넘어선 욕심이고, 탐욕은 통제되지 않은 욕망입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감정을 비롯한 다양한 변수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매우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통합적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뇌과학, 진화생물학, 행동경제학 등과 같은 최근의 과학에 의해서만 보더라도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자신의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상대화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고통과 불안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