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이야기

도올 김용옥 선생의 성서해석에 대하여

도마복음에 관한 칼럼을 써왔던 도올 김용옥 선생이 연재를 마치고 지난 일요일에 중앙SUNDAY와 대담을 했습니다. 연재와 대담은 매우 재미있었고, 유익했습니다. 나는 성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도마복음에 관한 그의 글에 대해서 뭐라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관한 그의 관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도올 선생은 그동안 기독교에 관한 많은 글과 강연을 통해 전통적인 기독교인이나 학자들에게는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해 왔습니다. 나는 이 논쟁에 가담하고 싶지도 않고 아직 그럴만한 능력이 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믿음(신앙)이라는 것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도올 선생에게도 그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이 글을 썼습니다.

 




믿음이란 항상 내 안에 있는 것이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나의 밖에 있는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나의 안에 있는 신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내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놀라움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2,000년 전에 예수가 직접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리스도(Christ)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그분의 모범에 따라서 그리스도가 됩니다. 영미권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Christian”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은 그리스도로서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자신을 직접 “Christ”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基督)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초월적 힘이 자신을 끌어당겨서 뭔가를 해주는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밖에 있는 신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나고, 신은 신이라는 분리된 생각이 오늘날 기독교계에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내가 잘 살고 구원받는 길은 내 밖에 있는 신에게 잘 보이면 된다는 탐욕적인 생각이 문제입니다.

 

도올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도마복음은 기독교가 해체돼 예수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가 기독자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예수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중앙SUNDAY 108, 2009.4.5일자 13)

 

예수가 기독자라고 믿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겠죠. 그냥 동아리 모임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에 대해 논의할 건더기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믿음의 체계가 아니니까요. 그냥 역사학이나 사회학이 되고 맙니다. 역사학이나 사회학은 종교가 아닌 엄밀한 학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학문은 특정한 믿음체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어떤 믿음에 근거하여 학문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그리스도적 사건이 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란  세속적인 학문의 결과와 아무 상관없이 매 순간 이 구원의 사건, 즉 십자가의 죽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잘 이해했고, 자신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인들도 그렇게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노예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 과부와 고아들, 나그네들, 누구나 천시하고 멀리하던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을 자기 가족처럼 돌보았습니다. 이 멈출 수 없는 거룩한 힘은, 당시로서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강대한 로마제국을 기독교의 품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하지만, 세속의 부와 권력이 주는 맛을 본 후부터 기독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부와 권력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그 힘을 과시합니다. 그것을 축복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육신이 부활하느냐 영혼이 부활하느냐를 가지고 네편 내편을 가릅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을 가지고 파벌을 만듭니다. 심지어 성만찬을 화체설(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설)로 봐야 하느냐 아니냐로 갈라집니다. 조선시대의 당쟁은 새발의 피입니다.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살육하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기독교인들이 내 안에 있던 신을 밖으로 빼버린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자 내 밖에 있는 신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온갖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차지한 신을 빼앗아 오려니까 갈등과 전쟁은 자연스런 현상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분오열은 신을 자신의 밖으로 빼버렸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것과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는, 편가르기
를 했던 모든 율법이 자신의 가르침으로 완성된다고 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면 천국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다음과 같이 비유로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 너희가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말 성경, 마태복음 25장 45절)


지극히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 배고플 때, 밥 한그릇 주지 않은 것이 하나님께 하지 않은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비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비유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비극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매일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부활의 기쁨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닌 역사 속에서 실존했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도올 선생의 말은, 인간의 탐욕을 허용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더 큰 분열과 전쟁으로 나가게 할 뿐입니다. 예수는 탐욕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적 삶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논쟁의 번지수를 잘못 찾으면 쓸데없이 서로 힘을 뺄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잡다한 교리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얄팍한 이성이나 조잡한 감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학문으로 대항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며 그 어떤 예술적 표현으로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울림을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실천하고자 했던 그리스도적 사역에 집중함으로써 기독교는 바른 방향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내가 곧 작은 그리스도(I’m a Christian!)”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독일어권에서처럼 내가 곧 그리스도(Ich bin Christ!)”라고 과감히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