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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이야기

세월호 사건은 그냥 적당히 넘길 사안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의 1주기인 416일 나는 삼성전자 신임보직자 과정에서 리더십을 위한 강의를 했다. 인간과 조직에 대한 철학적 반성에 관한 강의였다. 실천적 사례를 위해 스위스를 예로 들었다. 1848년 독립된 연방국가를 구성해서 오늘날까지 조용히, 그러나 꾸준하게 167년간을 한결같은 걸음으로 인간존중과 집단지성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해 왔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다. 한마디로 생산성과 창의성이 가장 높아, 가장 아름답고 가장 풍요롭고 가장 안전한 나라가 되었다는 말이다.

 

8백만 인구의 작은 나라 스위스가 그 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내 강의의 주된 내용이었다.(용인에 있는 신세계 인재개발원에서)

 











  

세월호 사건의 진상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모든 사건이 그렇겠지만, 이 사건은 더욱 그렇다. 304명의 인명이 졸지에 희생된 사건이거니와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의 무책임한 행동, 선박회사와 국가정보원의 의문스러운 행태, 해경과 해수부의 사건발생 당시와 그 후 처리과정의 불투명성, 이 사건과 관련된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 보여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말 바꾸기와 가당찮은 변명 등을 감안할 때 이 사건의 진실이 묻혀서는 안 된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지금까지 국민의 의견에 저항하고 대결해왔다. 심지어 국민을 속이기까지 했다. 이런 행태는 아마도 그들이 국가주의적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과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수십 년 전 이승만, 박정희 시대에도 늘 부작용만 낳았다. 국가는 소수를 억압하여 다수의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착각이 현정부와 새누리당에 계승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세월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행태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다양한 의견과 필요를 수용하지 못하고 권력을 가진 자신들의 뜻대로 이 사건을 강압적으로 처리하려고 한다.

 

국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나는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국가주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다원주의 패러다임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사회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집단들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발전할 수 있다. 다원주의 패러다임에 속한 사람들, 특히 서유럽의 정치인들은 소수의 의견(These)을 절대로 억압하지 않으면서 다수의 견해(Antithese)를 바탕으로 소수의 의견을 융합하는 창조적 대안(Synthese)을 만들어낸다. 사실상 이것이 창조경제의 핵심인데, 헤겔의 역사발전을 위한 변증법이 스위스라는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그런 정치적 능력을 어려서부터 기른다. 학교에서 시험성적으로 경쟁하는 일은 없다. 각자의 타고난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시험성적만으로 서열을 매길 수 없어 상대평가를 하지 않는다. 이런 생활원칙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협력과 나눔의 정신을 익힌다. 사회에 나가 직장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직책에 오르더라도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경우란 거의 없다. 회사의 사장이라도 자신의 견해와 다른 직원들과 토론을 통해 합의하는 정신을 발휘한다. 이런 사회에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도 거의 없다.

 

소수의 다른 의견과 상호작용하면서 새로운 창조적 대안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터득하는 사회는 발전한다. 이런 사회가 훨씬 더 생산성과 창의성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이런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은 존재의 성숙과 관계의 풍요로움에서 나온다. 스칸디나비아의 여러 나라들이 그렇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를 포함한 독일과 오스트리아도 비슷하다. 이렇게 인간존재의 성숙과 인간관계의 풍요로움을 간직한 나라, 다시 말해 다원주의 패러다임이 실현되고 있는 사회에서 만약 세월호 사건이 벌어졌다면 그들은 어떻게 처리할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행태는 너무나 안타깝다. 세월호 사건과 그 처리과정을 보면서,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인간의 실존적 미성숙과 인간관계의 빈곤함을 느낀다. 이들이 스위스의 정치인들처럼 다원주의 패러다임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우리나라의 장래는 어둡다. 그런 점에서 야당의 정치인들도 국가주의에서 벗어나서 다원주의 패러다임을 배워야 한다.

 

삼성전자의 간부들이 내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간관과 조직관에 대한 우려의 마음으로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희망을 갖는다. 참여자들이 제기하는 질문의 질적 수준이 곧 강의내용에 대한 이해의 질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나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희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