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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이야기

2015-04-25_인간존중과 집단지성

인간존중과 집단지성

 

지난주에는 부천 세종병원과 안양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 학생들에게 인간존중과 집단지성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나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앞으로는 상당기간 이런 주제로 강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식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그 원인을 낱낱이 밝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안전한 사회를 만들자는 주장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거부되고 있다. 생각할수록 참담해진다.

 

출산율이 최악의 수준으로 떨어지자 출산장려금을 지급하는 등의 유인책을 쓴다. 인간을 아직도 당근과 채찍으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정부가 하는 거의 모든 정책들을 따져보면, 인간존중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을 한낱 수단이나 자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과연 출산장려금을 받으려고 출산하는 부부가 몇이나 있을까? 세계 최고수준의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서 한강 다리 위에 조명을 달고 망을 치는 행위만큼 즉흥적이고도 유치한 해결책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면 출산율과 자살률의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된다.

 

내가 인간존중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히 출산율이나 자살률과 같은 통계적 차원을 훨씬 넘어선다. 우리는 지금 혁명적인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제4차 산업혁명(Industry 4.0)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기계장치와 부품에 센서를 부착하여 인간의 명령이나 의도적 개입이 없이도 기계와 부품들이 스스로 상호작용한다. 이것들이 스스로 인간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그 제품 스스로 고객을 찾아가서 서비스한다. 마치 부품과 기계장치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것과 같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가상의 물리세계(cyber-physical system, CPS)를 건설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진보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통제하는 생명이 있는 기계장치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컴퓨터는 물론이려니와 일상에서 늘 만나는 자동차도, 휴대폰도, 가전제품도 이제는 CPS 없이 작동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술문명은 우리 각자의 삶을 점점 지배해가고 있다. 이 대세의 흐름을 피할 수 없다. 앞으로는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을 통해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를 넘어 스마트 서비스(smart service)와 스마트 스페이스(smart space)를 거쳐 스마트 팜(smart farm)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스마트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인간의 의도적 개입이 없이 기계장치들이 스스로 작동한다는 의미다. 스마트 팜 개념은 인간의 먹거리조차 멀리 떨어진 농장(공장)에서 자동장치에 의해 재배되어 소비자에게 자동으로 배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문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존중이다. 인간 개개인의 처지와 개성, 타고난 재능과 인격에 상관없이 인간의 존재 자체가 존중되지 않는 한, 귀족과 성직자에게 억압받던 중세와 같은 사회로 다시 전락할 수 있다. 생명이 있는 기계장치들에 예속되는 사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은 홀로서기가 어려운 아주 나약한 존재다. 구세주가 나타나서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할 만큼,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존재다. 인류가 귀족과 성직자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연장했던 것처럼 그저 대책 없이 스마트한 기계장치에 삶을 의존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인간은 어딘가에, 그리고 누군가에 예속되기를 원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주체적으로 이 세계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고하는 힘, 고민하는 힘, 탐구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주체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힘을 기르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은 생각하는 힘은커녕 1년만 지나면 필요 없어질 지식과 정보, 직업세계에 나오면 전혀 쓸모없는 정답을 외도록 하는 교육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서로 협력하는 태도와 방법보다는 서로 경쟁하면서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태도와 요령을 터득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학교에서는 서로 협력하고 토론하여 집단지성을 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기득권자들에 대한 아첨과 충성심의 기능을 배우거나 타인에 대한 지배와 배제, 억압과 착취의 방식을 배운다.

 

내 강의를 듣는 기업인들과 직장인들, 그리고 학생들이 이 못된 세계로부터 깨어나기를 소망한다. 나는 강연에서 때로는 쌍스러운 말도 서슴없이 한다. 우아한 말만 듣고 살던 지식인들이 예수님이 퍼부었던 저 쌍스러운 말들, 유대인들을 향하여 내뱉은 '독사의 새끼들', '회칠한 무덤'과 같은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를 상상하곤 한다. 아마도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예수조차 그렇게 강력한 언어를 구사한 이유는 성직자 계급의 우아한 말 속에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존중과 집단지성은 결코 우아한 말에서 나오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는 것은 아주 좋은 현상이다. 이때 계급장을 떼고 토론이 이루어져서 정반합의 신테제(Synthese)를 이루어낼 수 있는 정신적 성숙함이 있어야 한다. 내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정신적 토대(spiritual base). 정신적 토대가 글러먹은 사회는 절대로 선진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천 세종병원에서(2015-04-21)

 

안양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에서(2015-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