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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에세이

유대인들의 "듣는 문화"와 상상력

비전(vision)은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서구문명에서 상상력을 가장 잘 발휘하는 민족은 아마도 유대인일 것입니다.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추상에 가까운 상상력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추상적 사고력(abstraction thinking)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할 것입니다.

 

창조적 전문가들에게 필요로 하는 추상적 사고력이 유대인들에게 유독 뛰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인구의 2%내외에 불과한 유대인들이 아이비 리그라고 불리는 일류대학교수들의 30%를 차지하고 있고, 미국 전체 부의  40%를 좌지우지한다고 합니다. 전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한데도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15%가 유대인이랍니다. 유대기독교적인 종교적 영향은 차치하더라도 인류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민족인 것은 분명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칼 맑스(Karl Marx)에서부터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을 거쳐 스타벅스의 CEO인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까지, 그리고 작가인 토마스 만(Thomas Mann)에서부터 지휘자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까지. 그래서 우리는 유대인들에 대해 조금은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차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듣는 전통과 보는 전통에서 오는 차이 말입니다. 히브리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은 것을 더 중시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더 중시했고, 선호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상을 섬기던 고향을 떠나라는 음성을 듣고 떠났습니다. 그 뒤의 수많은 선지자들도 야훼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모습이 구약성경의 전반에 흐릅니다. 인간은 야훼를 형상화하거나 시각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시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자 이를 죄악시 했고 가차없이 징벌했습니다. 이러한 야훼의 전설은 토라라고 불리는 유대인들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근간인 모세오경입니다. 유대인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탈무드는 구전동화 같은 엄청난 분량의 이야기들입니다. 이것은 후손들에게 반드시 들려주어야 할 교육자료로 활용됩니다. 보여주는 자료가 아니라 들려주는 자료로 말입니다.

 

신약성경에도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예수의 음성을 듣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믿음이란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기독교적인 전통에서 음악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음악 중에서도 특히 바하의 신앙고백적 음악은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는 서양문명이라는 것이 야훼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름'과 기독교인들의 순종적인 '들음'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 기독교문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직업생활과 일상생활 속에 녹아 있습니다. 독일인들의 국영일을 대개 성경의 절기를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부활절, 사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등...

독일어의 부르다는 동사는 rufen(루펜)인데, 부름을 당했다는 수동태가 되면 berufen(베루펜)이 됩니다.이것의 명사형이 바로 Beruf(베루프)입니다. 이 베루프라는 말이 곧 직업이라는 뜻인데, 그 직업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나를 그 직업에 종사하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찌 그 일에 조금이라도 잘못 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서양인들은 어떤 일에서든 장인(Meister,匠人)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서양문명을 지탱하게 하는 직업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