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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에세이

소비하라! 돈이 인간을 구원한다

나는 호롱불로 어둠을 밝히던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어려서는 검은 고무신을 신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고무신은 쉬 떨어질 뿐 아니라 발이 시커멓게 되는 게 흠이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면 밑창에 구멍이 나서 비 오는 날에는 신을 벗고 다니는 게 더 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읍내에서 흰 고무신을 사 오셨는데, 나는 그 신을 신고 다닌 게 아니라 아끼느라 들고 다녔습니다.

 

지금 내 신발은 신발장에 차고 넘칩니다. 여러 켤레의 구두는 물론, 조깅화, 등산화까지 기능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현대인은 생활필수품도 고장이 나거나 못쓰게 돼서 바꾸지 않습니다. 유행이 지나면 바꿉니다. 내가 쓰는 휴대폰이 6년 된 것을 알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공산품의 기능과 디자인을 바꾸는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모델을 빠르게 바꾸면서 소비자를 현혹합니다. 새로 나온 휴대폰을 갖지 않으면, 시대에 뒤진 사람처럼 느껴지도록 광고선전을 해대고 있습니다.

 

소비생활에도 유행을 탑니다. 욕망이 끼어듭니다. 명품을 끼고 다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고 싶은 욕망을 충족합니다. 비싼 명품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과시욕이 작용합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기 때문에 소비합니다. 그래서 경영학은 소비자의 욕망을 부추기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여기서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상품을 소비하고,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의 순환메커니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폐경제가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로 진화된 것은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때문이 아니라 타인과 차별화 하고 싶은 욕망이 상품을 소비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상품이 소비되지 않는다면, 생산되지도 않을 것이고, 공장은 문을 닫게 되고 자본도 축적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소비야말로 미덕입니다. 소비를 부추기는 행위는 사회를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소비는 거룩한 행위가 됩니다.

 

투자의 기본원리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라입니다. 경영의 기본원리는 욕망을 부추겨서 충족시켜라일 것입니다. 막스 베버와 동시대를 살았던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이런 현상을 아주 잘 포착했습니다. 100년 전에 쓰여진 그의 책 『돈의 철학』(Philosophie des Geldes)에서 화폐경제는 봉건주의를 극복하고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로 발전하게끔 유도했지만, 그 부작용이 심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자존감이나 삶의 태도가 돈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돈이 곧 신이다.”(Das Geld wird Gott.)

 

은행이 교회보다 더 큰 힘을 갖게 되었고, 도시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공동체적인 연대는 무너졌습니다. 예술가들조차 돈을 위해 예술활동을 합니다. 놀이로 하던 스포츠도 돈이 점령했습니다.

 

시계가 시간을 재듯이, 돈이 세상을 재고 있습니다. 막스 베버식으로 얘기하면, 돈으로 세상은 더욱 촘촘히 합리화 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짐멜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돈은 사회적 그물망을 짜는 거미이다.”(Das Geld ist die Spinne, die das gesellschaftliche Nets webt.)

 

현대인은 지금 거미가 짜 놓은 그물에 걸렸고,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돈의 승리는 질(Quality)에 대한 양(Quantity)의 승리이고, 목적에 대한 수단의 승리입니다. 현대인은 돈을 버느라 삶의 질을 포기해야 합니다. 왜 일하는지 그 목적도 잃어 버렸습니다. 인간적인 삶도 불가능해졌고, 삶의 자유도 잃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실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구시대의 봉건영주와 교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새로 얻은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더 큰 속박입니다. 구시대에는 영주와 교회로부터 피할 수 있는 여유공간이 있었지만, 이제는 돈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으로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즉 타인과 차별화 되는 소비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소비하는 인간(Homo consumans)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단순히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차별화된 소비를 통해 존재감을 향유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더 큰 차, 더 큰 집, 더 비싼 장신구, 더 큰 요트와 더 비싼 자가용비행기를 요구합니다. 혹시 미국의 부자들이 사는 동네를 가보셨나요? 마이애미 키 비스케인, 캘리포니아 서부해안 등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월 스트리트라는 도박판에 수많은 타짜들이 불나방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각종 수학적 모델을 가지고 도박판을 요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요리사들이 쓰고 있던 회칼이 어느 날 갑자기 무기로 변해버렸습니다.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여 수많은 요리사가 피흘리면서 퇴장 당했습니다. 도박판이 깨진 것입니다.

자기들만 피해를 보면 좋은데, 전혀 관련없는 사람들까지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영혼이 없는 수학모델에 의지한
도박으로, 그리고 자기과시를 위한 지나친 소비로, 구원받으려던  자본주의와 그 추종자들이 구원은커녕 쪽박을 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그토록 찬양했던 미국식 사회모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