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선악지향적인 사람과 손익지향적인 사람입니다. 선악지향적인 사람은 의사결정의 기준이 손익보다는 옳고 그름에 있습니다. 옳은 일이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일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부류입니다. 기독교에 교파가 많은 것도 이런 데서 연유합니다. 옳다고 믿기 때문에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믿는 진리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포용력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서로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죄책감이 중요한 행동의 원천입니다.
하지만, 손익지향적인 사람은 행동의 동기가 선악보다는 손익에 있습니다. 그것도 이기적인 손익에 의사결정이 좌우됩니다. 물론 겉으로는 공익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기도 합니다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인 손익이 우선입니다. 이들에게는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먹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상도(商道)를 지키는 존경 받을만한 상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 수가 일본이나 유럽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 이유는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우리사회가 선악중심의 사회에서 손익중심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상인들에게 터무니없는 바가지를 써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독일유학시절 여러 나라를 여행했지만, 이탈리아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바가지를 써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지불한 가격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국한 이후로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불을 켜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상거래를 해야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선악이 손익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사회에서 기업인들과 지도자들에게서 수치심과 죄책감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손으로 뽑은 지도자 중에서 가장 수치심과 죄책감을 많이 가지고 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악지향적인 의사결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옥양목에 풀 먹인 듯 뻣뻣했던 대통령이라는 권위주의의 상징을 유럽의 정치인들만큼이나 부들부들하게 풀끼를 빼버렸습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손익중심으로 행동하고 결정하는 뻔뻔한 인물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는 손해 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묵묵히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치욕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손익중심의 인물들이 그 동안 저지른 추악한 비리에 비한다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참을 수 없을 만큼 모욕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명예가 무너졌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수치심과 죄책감에 떨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의문입니다.
그래서, 『국화와 칼』을 떠올렸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1887~1948)에게 연구를 부탁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지 꽤 됐지만, 일본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않은 사람이 일본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그렇게도 잘 짚어낼 수 있었을까, 하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본인들을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인들을 잘 모릅니다. 하긴 우리 자신도 잘 모르는 판에 바다 건너 섬사람들의 특성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겠지요.
그녀는 일본인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가장 큰 요소가 수치심(shame)이라고 보았습니다. 일본인들은 타인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모욕당하는 것을 크나큰 불명예로 생각합니다. 모욕하는 것도 모욕당하는 것도 매우 수치스런 일입니다. 그래서 일본말에는 상대방을 비하하는 욕설이 거의 없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수치심을 건드리는 일은 복수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근대 이전에는 모욕을 받은 경우, 상대에게 반드시 복수를 감행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근대적인 법률체계가 완비되면서 상대에 대한 물리적인 복수가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한 복수, 즉 자살을 시도하곤 합니다. 일본에서는 그래서 불명예스런 일들이 발생했을 때는 할복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서양에는 유대기독교적인 전통에 따라 수치심보다는 죄책감(guilty)이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양심에 따라 사회적 행동이 좌우됩니다. 여기서 양심이란 옳고 그름, 즉 선악시비의 마음을 말하며, 이것이 행동을 일으키는 원천입니다. 중세에는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성경에 대한 해석권한을 독점했던 교회의 가르침에 의지했습니다. 인간의 행동은 선악을 판별하는 양심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유대기독교의 기본사상이었습니다.
양심의 빛은 희미해지고, 선악은 손익으로 바뀌었습니다.
근대적인 이성 중심의 계약사회에서는 양심의 소리보다는 법률에 저촉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계약, 법률, 합리성 등과 같은 근대적 이상(理想)은 인간에게서 죄책감이 점차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계약과 법률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정한 것이고, 그것조차도 힘있는 자들의 농간으로 만신창이가 되곤 합니다. 계약과 법률이 주로 가진 자의 자기방어기제로 작동하는 현대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제도적으로 양심의 빛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법률이 복잡해질수록 인간의 양심은 점점 더 무뎌지고 죄책감은 더욱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자본주의적 사상이 전지구적인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서부터 옳고 그름에 대한 양심의 문제는 이익과 손해의 경제문제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이익이 되면 옳은 것이고 손해가 나면 틀린 것이 됩니다. 이익과 손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손익지향적인 사람에게는 손익은 영원하고 선악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익이란 사회적 손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손익을 말합니다.
사회적인 손익은 공익의 문제이기 때문에 선악의 판단에 포함됩니다. 유대기독교적인 전통에서는 사회적 이익을 선악의 문제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이익이란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돕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굶주린 자에게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당장 그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성향과 상관없이 오늘날 선악지향적인 사람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고, 손익지향적인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사회를 비교해 보았을 때, 미국에는 손익지향적인 세력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유럽사회에는 아직도 선악지향적인 사람들이 지도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특히 북구의 여러 나라들은 유대기독교적 사상에 근거한 죄책감이 지도층에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들의 양심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적인 사회규범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사회는 어떤가요?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는 현지도층의 행태에서 늘 보듯이, 그들에게는 수치심이나 죄책감 같은 것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오로지 손해를 보는 것은 악이고, 이익이 곧 선이라는 등식만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정책적 의사결정을 보면, 사회적인 손익이라는 빌미를 끌어다 대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손익계산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손익지향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손해를 보더라도 옳은 일을 하고자 했던 노무현은, 기업인들에게 돈이나 갈취하고 부정부패에 찌든 인간으로 비춰진, 저 모욕적이고도 불명예스런 사건들에 직면했을 때,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아, 오늘은 정말 슬픈 날입니다.
이제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그는 분명 손익을 따지되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했던 대통령이었습니다. 선한 양심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도덕인 법률조차 어기면서까지 오로지 손익만 따지는 파렴치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더욱 슬픈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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