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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에세이

누가 김용민을 비난할 수 있는가_다시 텍스트와 컨텍스트에 대하여

김용민 후보의 막말로 여러 언론들이 비난과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이는 사태의 진실과 정의, 즉 그 사건을 발생시킨 컨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다른 정치적 노림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싸움의 발단은 김용민의 막말이 아닙니다. 싸움은 미국이 세계의 메시아로 자처하는 방식의 일방적 패권주의 정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혀 명분이 없는 전쟁을 이라크에서 일으켰고, 포로들에게 행한 성적 가혹행위가 잘 알려지는 바람에 세계인들이 경악했습니다. 당시 부시 행정부에서는 라이스 국무장관과 럼스펠트 국방장관이 책임을 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라이스를 강간해야 한다는 김용민의 막말이 바로 이런 상황을 패러디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마치 그 말 자체가 큰 범죄인양 확대 재생산하는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흔히 갈등이 싸움으로 확대되는 것을 보면, 갈등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느냐에 따라 싸움으로 확대되는 경우를 가끔 보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런 말을 했잖아!"라고 했을 때, 상대방이

"당신이라고 그랬어? 네가 뭔데 나더러 당신이라는 거야?"

이쯤 되면 갈등의 핵심은 무시되고 무슨 말을 했느냐로 싸움이 확대됩니다. 오로지 그런 언어가 가능케 한 사태의 본질은 사라진 채 의미 없는 "언어적 텍스트"만 남게 됩니다. 이때 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바로 이 텍스트에 갇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싸움이 확대됩니다. 지금 언론인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를 벗어나 컨텍스트를 보면,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지적 능력을 일부러 발휘하지 않고 있거나 아니면 그것이 상실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김용민의 막말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그런 막말로밖에는 분노할 수 없는 거악(巨惡)의 실체에 분노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난 번 글 <김용민의 막말: 텍트스와 컨텍스트에 대하여>에서 2천년 전 유대인들인 법률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뱀들,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막말을 하신 예수님을 향해 우리가 비난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