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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이야기

인간은 실존한다


‘나는 누구인가’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관계 속에서만 결정됩니다. 관계는 존재의 본질적 속성을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지금 오른손에 칼을 잡고 있다고 칩시다. 왼손에 사과가 있다면, 오른손의 칼이 무엇을 뜻할지는 뻔합니다. 누구나 내가 과일을 깎으려고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왼팔로 한 남자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면 오른손의 칼은 무엇이 될까요? 살인무기가 됩니다. 이렇듯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관계 속에서만 그 본질을 드러냅니다.

 

칼은 장인(匠人)의 영감에 의해 종이나 과일을 자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직접 말했듯이, 칼에 있어서는 본질(라틴어로 essentia), 즉 과일 깎는 칼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제작법과 성질의 전부가 실존(라틴어로 existentia)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항상 고유한 특성, 즉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항상 실존에 앞섭니다.

 

사실 서양철학사에서 본질과 실존의 문제는 고대그리스철학에서부터 내려온 존재론과 인식론의 긴 여정의 산물입니다. 오랫동안 모든 사물과 현상들이 항상 본질(essentia)과 그 본질들의 관계를 규명하는 존재(existentia)의 문제로 나뉘어서 사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재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의 변하지 않는 속성 또는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칼이 장인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인간은 도대체 누구의 영감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2,500년간을 철학자들이 사유해봤지만 그것에 대한 대답은 알 수 없다였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은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위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덴마크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였습니다. 그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재(existence)를 다른 사물이나 현상과 구별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존재를 위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실존(existence)이라는 용어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인간존재에 부합하는 이 실존(實存)이라는 용어를 좋아합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다른 사물들에는 존재하지만,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존하는 존재인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그 가치와 의미를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만 실존한다는 말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늘 인간은 영혼을 가진 실존적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Existence precedes essence.)라는 유명한 명제가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실존한다는 말은 사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 사물과 적극적인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PC에 글쓰기와 인터넷을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내가 PC와의 풍요로운 관계 속에 존재하게 됩니다. 나는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이러한 관계에 대해 책임 있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실존성(實存性)이란 자유와 선택, 그리고 책임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물과의 관계설정은 실존하는 인간이 일방적으로 정하기 때문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일방적일 수가 없습니다. 타인도 나와 동일한 성정을 지닌 실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갈등과 스트레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성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사는 부하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보거나, 경영자가 구성원을 한낱 조직목표달성의 수단으로만 다룬다면, 인간의 실존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조직생활의 고단함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부부간에도 상대방을 한낱 욕망의 충족을 위한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 마음과 마음은 단절되어 갈등이 쌓이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는 모든 인간을 실존적 존재로 평등하게 인정하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인을 실존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수천 명의 미군병사들과 수많은 이라크 시민들이 죽었습니다.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의 징조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전쟁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습니다. 부시의 눈에는 미군병사들과 이라크 시민들이 존재를 위한 존재’, 즉 실존적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가 말하는 ‘나’(Ich)와 ‘너’(Du)의 관계에서 ‘나’(Ich)와 ‘그것’(Es)의 관계로 바뀝니다. 인간사회의 불행은 대부분 상대방을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 즉 ‘그것’(Es)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존에는 타인의 실존이 필수적입니다. 나의 실존성을 보장하는 것은 타인과의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갈등의 원인은 부시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의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단절되어 있는 착취의 관계가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나는 실존주의 철학이 한 때 유행하는 철학적 사조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해명하는 영원한 사유의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그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선택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에서만 인간의 실존성이 문제되진 않습니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사가 다 실존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상사는 그의 부하들의 실존성을 존중해 주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하들도 상사를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당장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업가들은 사업파트너들을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상이나 수단으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친구간에도 그랬을지 모르고, 사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 강의를 듣는 기업체의 간부들을 오로지 내 수입을 늘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영혼에 진정으로 보약이 되는 내용을 포기하고 당장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마음과 마음이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 효율성(efficiency)이 가장 높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단점이나 취약점이 드러나더라도 상대방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 과감한 시도를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은 신뢰의 표상이며, 신뢰는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기반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가 옆에 있을 때, 넘어지더라도 과감히 걸음마를 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타인을 실존적 존재로 인식하여 그와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관계에 있었을까? 우선 나의 아내와는? 부모형제와는? 아이들과는? 내가 사업상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는? 그들이 나를 실존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들을 의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음(connectedness)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을까? 내가 상사였을 때 부하들에게 그들의 실존성(자유, 선책, 책임)을 인정하고 그들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을까? 나와 나의 상사는 어땠을까? 뒤돌아보니 아쉬운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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