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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

결혼식에 늦은 이유

어제(2008.12.06) 육촌 형님의 딸이 결혼했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12시에 도착해서 보니, 이미 예식이 끝나고 피로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는 분명히 오후 1시에 예식이 진행되는 줄 알고, 조금 일찍 도착해서 친척들과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시간 전에 도착하도록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리고는 12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예식이 벌써 끝난 것입니다. 청첩장을 다시 보니, 아뿔사 오전 11시로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왜 오후1시로 기억하고 있었을까?

 

사연은 이렇습니다. 2주전 형님의 아들 결혼식에서 만났던 친척들이 뒤풀이를 겸해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좌장격인 사촌형님이 다다음주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뒤풀이를 용산에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모두들 동의했습니다. 용산에서 만나는 시간계획까지 그 자리에서 했습니다. “오후 1시에 결혼식이니까 간단히 점심을 먹고 어쩌고 하면 3시쯤 될 것이니, 용산에서 모이면 3시 반에서 4시정도에 모여서 뒤풀이를 하고, 저녁을 먹고 헤어진다. 알았지!”

 

좌장의 이런 시간 계획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오후 1시에 결혼식이니까…”라고 얘기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들 그렇게 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시간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오후 1시로 굳어진 것입니다. 그 때 그 자리에 참석했던 10여명 전원이 결혼식이 끝난 후에 도착했습니다. 누구도 시간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집단최면에 걸렸다고나 할까요?

 

사실 나는 오후 1시라고 얘기한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구심이 들긴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좌장의 확신에 찬 주장에 다들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청첩장을 잘못 보았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날 늦게 참석한 친척들 모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나의 형님은 그 동안 청첩장을 식탁 위에다 잘 보이도록 펼쳐서 세워 놓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에 대해서는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좌장이었던 사촌형님은 어떻게 오후 1시라는 터무니 없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까? 자신은 지금까지 오전에 결혼식 하는 것을 참석해 본 적이 없었고, 2주전 형님의 아들 결혼식도 오후 1시였기 때문에 조금의 의심도 없이 이번 결혼식도 오후 1시일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확신에 찬 목소리에다 좌장의 권위를 실어서...

 

경영실무에서도 가끔은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어떤 의사결정을 위한 회의에서, 어떤 참석자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을 하면, 약간의 의구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그냥 좋은 게 좋으니까 반대를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회의를 했지만, 결국은 목소리가 크거나 최초의 주장에 모든 다른 의견이 그냥 묻혀 버리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그 의견을 충분히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엉뚱한 결정을 내리거나 모든 사람이 집단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이런 경우를 애벌린 패러독스(Abilene Paradox)”라고 합니다.

 

나는 어제 하루 종일 애벌린 패러독스에 시달렸습니다.

 

애벌린 패러독스에 대해서는 Jerry Harvey, Managing Agreement in Organizations : The Abilene Paradox, Organizational Dynamics(Summer 1974), pp. 63-80 또는 William Dyer, 강덕수 옮김, Team Building, 삼성북스 2005, 74~79쪽을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