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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이야기

철학적 사유와 시스템적 치유(6)

철학적 사유와 시스템적 치유(6)


먼저 읽어야 할 글:

     철학적 사유와 시스템적 치유(1)

     철학적 사유와 시스템적 치유(2)

     철학적 사유와 시스템적 치유(3)

     철학적 사유와 시스템적 치유(5)


4. 조직(組織, Organization)이란 무엇인가?

 

조직이란, 개념적으로 정의하자면, 공동의 목적/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협동체/공동체를 말한다. 이런 개념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실천적 정의는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나온다. 재덕이 겸전(兼全)한 자를 뽑아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로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출애굽기 1821~22).

 

이 말은 모세가 6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반도로 들어섰을 때, 그의 장인 이드로가 조언을 한 것이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의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면 모세가 분주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충고였다.

 

하지만, 열흘이면 당도할 수 있는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데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장인의 충고를 받아들인 모세가 위계구조와 그에 따른 위계질서를 만들어 지휘했으나 가나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고단한 광야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각주:1] 장인 이드로의 충고는 계급구조를 통해 백성들을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했다. 만약 천부장, 백부장과 같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위해 더 많이 봉사하고 돕도록 했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광야에서 고생하게 된 원인은 조직을 위계구조에 따른 위계질서로 다스려야 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위계질서가 꽉 잡힌 조직에는 불신, 갈등, 아첨, 텃세, 배신, 왜곡된 커뮤니케이션 등과 같은 죽음에 이르는 조직의 질병들이 존재한다.[각주:2] 조직에서 위계질서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의 존재목적과 비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잠재력을 맘껏 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인간과 조직에 관한 철학적 성찰이다. 이 성찰은 철학적 사유와 시스템적 치유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게 한다.

 

위계질서에 대한 구약성서 시대의 잘못된 믿음이 중세의 암흑시대를 거쳐 근대의 제국주의적 군사문화 속에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정신의 관성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피라미드형 수직구조가 조직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인다고 착각하게끔 만들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연구결과와 실무경험을 종합하면 명령과 지배의 수직구조는 단기적으로 높은 효율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장기적으로 비효율성을 드러낸다.

 

조직의 창의성과 생산성을 높이려면, 피라미드형 수직구조를 네트워크형 수평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인간은 홀로 독립할 수 없으며, 어떤 경우라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차리게 된다. 결국 통제와 지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인간은 사회적 역할을 자율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자기실현을 성취할 때, 창의적이고 생산적으로 변모한다.

 

아래 그림을 보면 더 명확해질 것이다. 명령과 지배의 계급적 수직구조가 역할과 책임의 수평구조로 전환되었다.

 

 

 

조직설계의 두 가지 원칙

 

통제와 지배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직설계의 두 가지 원칙이 구현되어야 한다.

 

연대의 원칙(principle of solidarity)

보충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

 

우선, 연대의 원칙은 질병이나 화재와 같은 사고를 당했을 때 곤궁한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사회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직업을 잃을 수 있으며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이때 사회적으로 연대하여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연대의 원칙이다. 예를 들어, 실업보험이나 의료보험 또는 은퇴 후의 노년을 위한 연금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국가가 무상교육, (거의)무상의료, (거의)무상주택의 의무를 지고 있는 서유럽의 국가들처럼, 사회적이고 공적인 상호부조의 시스템을 잘 갖추어야 선진국처럼 높은 창조성과 생산성을 구현할 수 있다.

 

이런 연대의 사회적 원칙을 실현하는 것은 실존주의적 인간관에 기인한다. 서유럽 국가를 운영하는 지성인들의 심연에는 모든 인간의 실존적 평등과 기능적 불평등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다그들은 이 연대의 원칙(principle of solidarity)을 사회 시스템을 설계할 때 그대로 반영했다. 이것은 조직 내에서도 구성원들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해 조직 전체의 창의성과 생산성을 높이도록 하는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둘째, 보충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은 조직설계에서 매우 중요한 원칙이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를 신봉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조직설계에서 이 원칙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미국은 조직설계에서 피라미드형 수직구조, 즉 명령과 통제, 지배와 복종, 억압과 착취의 보편성을 추구한다. 미국형 주식회사의 수직구조에는 CEO가 정점에 있다. CEO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고 그의 명령과 지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도 조직설계에서 이 보충의 원칙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비극이 시작된다.

 

썹시디애리티(subsidiarity)라는 용어는 기독교 전통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특히 중앙집권화 되어 있는 카톨릭 교회에 대해 16세기 종교개혁을 주도하던 칼빈주의자들이 교회조직의 분권화를 위해 정립한 개념이다. 나중에는 이것이 18세기에 카톨릭 교회의 사회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보충의 원칙이란, 모든 인간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권리와 의무를 지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한 경우에 역할이 큰 지위에 있는 사람이 지원해 주거나 아니면 그 문제를 떠맡아서 처리해 주어야 한다는 원리다. 어린이는 스스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런 원리가 조직설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관계에서 모든 일을 지방정부가 자치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해 나아가야 하지만, 지방정부 자체에서는 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국방, 외교, 환경, 사회적 간접자본 등과 같은 이슈들은 중앙정부가 담당한다. 즉 중앙정부는 지방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연방국가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서유럽의 국가들은 대부분 바로 이런 보충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에 따라 개인, 가정, 기업, 국가가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보충의 원리는, 상위조직이 하위조직의 자율성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핵심사상이다. 이것은 유럽연합을 구성하는 조직설계의 원칙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원칙, 연대의 원칙과 보충의 원칙은 그 사회가 지향하는 인간관에 따라 달라진다. 연대보다는 경쟁을 강조하고, 보충보다는 지배를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아무래도 개인이나 말단조직에 더 큰 부담을 지게 함으로써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사회적 불안감이 점차 커지게 된다.

 

연대와 보충의 원칙을 더 중시할 것인가, 아니면 경쟁과 지배의 원칙을 더 중시할 것인가의 문제는 그 사회 또는 조직구성원들의 인간과 조직에 대한 인식의 성숙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직설계에서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연대와 보충의 원칙)이 결정되고 나면, 각 개인이 맡고 있는 직무가 창출해야 할 성과가 무엇인지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 이 역할과 책임을 성과책임(accountability)이라고 한다. 성과책임 개념은 직무와 항상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우선 직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불분명하면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보충의 원칙도 실현하기 어렵다.

 

직무(job)와 성과책임(accountability)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는 직무가 직무담당자와 구별되지 않은 채 직무담당자를 쥐어짬으로써 직무를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직무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무란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맡고 있는 모든 업무내용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그 직무를 현재 우연히 홍길동이 맡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직무와 직무담당자는 완전히 구별되는 개념이다. 수도권영업담당 본부장은 하나의 직무다. 홍길동이 영원히 그 본부장이라는 직무를 맡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수도권영업담당 본부장이라는 직무와 홍길동이라는 개인을 완전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직무분석이란 (홍길동이 아닌) 그 직무에 기대되는 산출물(expected output)이 어떤 것인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그 최종산출물이 바로 성과책임(accountability)이다. 직무의 성과책임이 무엇인지를 사전에 명확히 하는 행위가 곧 직무분석이다. 많은 사람들이 직무분석을 과제의 업무량과 업무시간을 측정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직무개념을 연대와 보충의 개념이 아닌 경쟁과 지배관계 속에서 권위주의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직무란 그 산출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즉 성과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조직구성원은 누구나 직무가 만들어내는 최종성과(기대성과)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명하고 그것을 성과주의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대성과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성과지표를 선택하는 것보다 우선해야 한다. 여기서 성과지표는 중요하지 않다.

 

직무의 성과책임을 명확히 밝히는 것은, 즉 직무분석을 통한 직무의 성과주의적 인식은 보충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를 구현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조직에서 보충의 원리란 성과책임이 큰 상위직무가 성과책임이 작은 하위직무를 지원하고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위직무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이며 어디까지인지가 명확해지면 상위직무의 역할과 책임도 보다 명확해진다.


 

  1. 최동석, 다시 쓰는 경영학, 251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2. 해럴드 래빗, Top Down, 17쪽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