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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이야기

인간이란 무엇인가(1)_인간을 보는 눈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경영학은 인간을 무엇으로 보는가? 지난 100년간 경영학은, 특히 미국경영학은 인간을 자원(resource)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자원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표현하면, 재무제표의 당기순이익을 위한 자원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인적자원(human resource)이라고 부릅니다. 인적자원에 투자된 돈은 철저하게 비용으로 처리됩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기본 전제가 끝없는 경쟁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긴장과 불안, 스트레스와 우울증, 부정적 정서와 제한적 신념 속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회사인간(corporate human)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재무제표의 비용계정을 구성하는 부품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높은 생산성을 구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으나, 생산성은커녕 온 인류를 깊은 불황의 늪에 빠지도록 했습니다.

 

나는 이제 대전환의 계기를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강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인사조직 최근 주제연구 마음을 사로잡는 경영은 가능한가라는 과목으로 강의한 것을 녹취 정리했습니다. 지금은 명령과 통제를 통한 쥐어짜는 방식의 경영관행이 근본적으로 전환되어야 할 시기입니다. 그래서 경영과 경영학에 대한 사유의 틀을 좀더 확장했으면 하는 소망으로 이 글을 여기에 올립니다.


인간을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탈레스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해 보려고 노력해 왔었기 때문에 그 많은 성과물들을 다 들여다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내가 즐겨 쓰는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개관해 보려고 합니다.

 

나는 인류가 인간에 대한 관점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계기를 철학적 논쟁에서 찾습니다. 철학자들이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크게 세 번 정도 바꾸었습니다. 

 

펠라기우스 논쟁

 

그 첫 번째가 펠라기우스 논쟁이었습니다. A.D. 400년경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와 펠라기우스(Pelagius, 대략 354~440?)가 기독교 세계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젊은 시절에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으나 나중에는 플라톤의 이원론 철학에 심취했고, 밀라노의 주교에게 영향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고백록』은 자서전 문학의 백미일 뿐 아니라 서구문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경험과 성찰을 통해 인간은 완전히 타락했으며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수도사였던 펠라기우스는 해박한 도덕주의자로서 당시 로마 시민들과 귀족들의 방탕한 생활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했고 원죄개념을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완전성에의 자연적 능력을 선천적으로 부여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오직 신의 주권적 은혜만이 완전히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이러한 두 주장 사이에 논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화되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교회는 431년에 에베소라는 곳에서 공의회를 열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구의 고대사회가 막을 내리고, 신에 대한 신앙과 거룩함이 충만한 중세가 시작됩니다. 적어도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라는 걸출한 신학자가 나타나기까지 이성의 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고대 로마제국이 쇠망하자 교회에 대한 제국의 통제력은 약해지면서 반대로 교회의 세속적 권위는 점차 높아졌습니다. 제국이 건설한 정치적, 법률적, 경제적 질서를 통해 교회는 유럽사회 전체를 묶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명실상부한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극심한 가뭄, 전염병, 천재지변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신앙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서민들의 평균수명이라야 30년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고통과 죽음은 정상적인 것이었죠.

 

전쟁이 일상사였고, 어떤 때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수십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식량부족으로 먹을 것이 없어서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혹서나 혹한으로 죽는 것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이 곧 신의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신앙은 수도원을 통해 교리로 정교화되어 갔습니다.

 

두 종류의 진리

 

하지만, 이런 상황은 13세기가 되면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된다는 사실은 신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에 의해 얻는 진리도 있지만, 이성적 판단으로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그 둘은 변증법적 작용을 통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아퀴나스까지 약 800년간의 중세는 신앙이 이성을 압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아퀴나스 이후에는 신앙과 이성이 비등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성의 힘은 급속도로 팽창하게 됩니다. 그 하나가 문예부흥이었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혁명이 일어납니다.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예부흥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신앙에 억눌려 왔던 이성이 자유를 만끽하면서 표출된, 억압되지 않은 인간의 자연스런 활동의 결과였습니다.

 

종교개혁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버린 교회에 대한 이성적 저항운동이었습니다.

 

나아가 이성의 힘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들을 안겨 주었습니다. 과학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지동설이었습니다. 인간이 사는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쿤(Thomas Kuhn, 1922~1996)이 말한 대로 기독교인들이 1400년간이나 굳게 믿어왔던 것들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짓이었지만, 교회는 가혹하게 과학자들을 탄압했습니다.

 

인식의 확실한 근거

 

이성의 힘은 수학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풍조는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에 의해 더욱 풍부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인식은 인간 자신의 인식주체와 외부세계인 객체와의 교섭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 유명한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의 철저한 회의는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식의 확실성이란 내가 아는 것이 어디까지가 진실한 것인지를 의심해 들어가다 보면, 마지막으로 의심하는 자신의 존재만큼은 의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사유하는 한 개인의 중요성이 이 세상에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의 핵심은 인식주체가 절대화 되지 않으면 타인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의 확실성은 보장할 수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한 개인의 존재가 절대화되기 시작합니다. 중세 교회가 가르쳤던 공동체적 이상과 가치는 사라지고, 나의 인식이 확실하다는 믿음에 기초한 진리의 추구만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성이 신앙을 완전히 압도하게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사고방식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의 서양세계에서 신앙을 완전히 떼어내고 이성만으로도 존재와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선언한 셈입니다. 이것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후에 성립된 철학은 이러한 데카르트의 성찰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데카르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말하자면,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에서 패배한 펠라기우스가 1,200년도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명예를 회복하게 된 셈입니다. 

 

이렇게 이성이 신앙을 압도해 가는 사상적 흐름 속에서 인류가 경험한 핵폭탄과 같은 충격이 세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 충격

 

첫 번째 충격은 아퀴나스가 이룩한 신앙과 이성의 통합작업 후에 나타났어요. 그게 바로 앞서 언급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었는데,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얘기지만, 그에 따른 교회의 핍박도 대단해서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도 그런 주장을 하려면 목숨을 걸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힘이 아무리 커도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사실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나타나서 우주의 중력체계를 확립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뉴턴은 우주가 거대한 정밀시계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에 대한 해석체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 충격

 

두 번째 충격은 데카르트의 이성혁명 이후에 있었던 일인데,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입니다. 이 사건은 교회가 지동설의 충격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려는 순간에 떨어진 핵폭탄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파충류라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의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도 아직 많습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야훼의 신이 천지를 창조한 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교회는 창세기의 과학적 설명을 가급적 회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지동설을 교회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진화론도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설사 인류가 파충류에서 진화되었다고 해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주를 거대한 정밀시계처럼 신이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이 열심히 노력하면 우주의 운행원리를 파악해서 만물의 영장임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는 과학적 사실과 그 발견과정에 두려워하거나 당황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건은 물리적 실체가 아닌 개념적 실체에 관한 설명이기 때문에 물리학적 지식과 분석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과학이 창조에 관하여 실증적으로 어떤 결과를 내더라도 불변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11절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모든 것의 결론입니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영혼과 그 능력의 문제가 출발합니다. 이 문제는 좀더 깊이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논의할 것입니다.

 

세 번째 충격

 

그런데, 지난 20세기 초에 세 번째 핵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 의해 인간의 행동은 이성의 확실한 근거와 상관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인간은 마음의 심연에 잠재된 무의식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과 그에 따른 행동은 무의식적 작용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강의실에 오는 것은 물론 의식적으로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무의식의 작용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심리학적 결론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나도 모르는 것에 의해서 행동하고 있는데, 그것이 내가 모르는 심연의 그 무엇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실로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신앙의 힘을 압도한 이성의 힘으로 인류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자신의 행동이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의식적인 행동만이 전부가 아니며, 행동은 보이지 않는 마음의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무의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다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심연을 향하여 이성의 날을 세우고 분석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심리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성의 힘이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지배력을 확장하게 되자, 학문방법론은 거의 완벽하게 요소환원주의(elemental reductionism)로 바뀌었습니다.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되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상태까지 분해하여 그 개체들을 분석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더욱 확고히 갖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이성중심적인 발상이고, 데카르트-뉴턴식 해결책(Cartesian-Newtonian View)입니다. 전체는 요소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요소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