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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이야기

인간이란 무엇인가(3)_이데올로기의 문제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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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란 무엇인가(2)_경영학의 인간관 문제
 

이제 이데올로기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이데올로기란 문자 그대로 아이디어의 학문입니다. 아이디어의 논리, 즉 관념의 학(
)이라는 말입니다. 서양사상사의 전통은 관념을 중시해왔습니다. 신이나 이성의 작용은 다 관념 속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입니다. 어느 시대건 그 시대를 지배하는 관념이 존재합니다. 중세에는 신이라는 관념이 세상을 지배했고, 오늘날에는 실증적 이성 또는 과학이라는 관념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보면, 자본()이라는 관념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의 지배적 관념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잘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무의식화 되어 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이런 지배적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점은 무엇인지를 밝히는 학문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6)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에서 헤겔(Georg W. F. Hegel, 1770~1831)의 철학체계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인간의 정신 또는 이성은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절대정신을 이루고 그 정신의 현현이 국가체계를 형성한다는 헤겔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해나갔습니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삶의 물적 토대와 그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지, 형이상학적인 관념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헤겔 철학은 본말을 전도시켰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전도된 현상 또는 전도시키는 힘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현실적인 삶에서도 본말이 전도된 현상을 많이 느끼곤 합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 시대를 지배하는 하나의 관념입니다. 백성 에 주인 니까 어떤 경우에도 백성이 주인이 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죠. 그래서 민주주의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백성이 주인이 되지 못하지요. 선거에서 뽑힌 정치인들이 주인이 되고 백성들은 한낱 머슴으로 전락해 있는데도 그것을 잘 모르고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본말이 전도되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지배적 관념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숭고한 대상

 

따라서 어떠한 지배적 관념이라도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경쟁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온 국민과 기업을 시장경쟁체제에 적합하도록 바꿔야 한다는 관념은 신자유주의적 발상인데, 국가경쟁력을 높이자는 것을 볼 때, 그 명분은 나쁠 것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관념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되면 본말이 전도되어 남미와 같이 극심한 빈부격차로 경제와 사회질서가 오히려 후퇴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관념이 좋으냐 나쁘냐도 중요하지만, 그 관념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어떤 것이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독일에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TV광고에 일등 하는 자만이 기억된다는 카피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광고를 보는 백성들은 , 우리가 일등을 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일등 하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온 국민이 그 광고를 보고 그래 맞다. 일등 하는 사람만 역사에서 기록됐구나. 우리도 일등 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자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김우중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대우신화가 생겨났고, 후회 없는 한판의 대박 인생을 그린 재벌회장들의 자서전이 대거 출간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념들이 이데올로기화되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 즉 재벌회장들처럼 열심히 살면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전도된 힘에 의지하고 있을 때, 거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거품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터질 때까지 자기증식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거품이 자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일시에 주저앉았습니다. 우리는 외환위기를 맞게 되었고 수많은 종업원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뿌리가 100년이 넘는 시중은행들(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신탁 등)이 지금은 그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외국계로 팔리거나 중소은행들에 합병되었지요. 내가 한국은행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처참했어요. 당시 제일은행의 어느 퇴직직원이 만든 <눈물의 비디오>는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어느 시대에서나 지배적인 관념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고, 그러면 본말이 전도되는 사회적 현상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중세에는 신에 대한 관념이 지배적이어서 신앙의 이름으로 부패와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신앙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자본에 대한 관념이 지배적이어서 이것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자본, 즉 돈이란 교환과 지불의 수단으로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도록 도와주는 수단입니다. 이 수단이 숭고한 대상으로 변화되었고, 본말이 전도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물고 늘어진 사람이 바로 슬로베니아 출신의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입니다. (그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을 참고하세요.)

 

지젝은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류블랴나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프랑스에 유학해서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사유에 많은 영향을 받은 학자입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등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대가이자 현대문명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상가입니다. 그의 책은 어느 것이라도 붙들고 정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슬로베니아는 과거 유고연방의 일원이었다가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후에 연방에서 독립한 아주 작은 국가입니다. 지난 여름 휴가 때 잠시 들린 적이 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알프스의 동남쪽 발등상에 위치한 국가로 국민소득이 약2만불 정도 되니까, 평균적인 가계경제수준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편이지요. 그런데 시골 구석구석이 잘 살더군요. 나는 그렇게 깨끗하게 되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시골마을에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동네를 산책하다가 평범한 아주머니와 할머니를 만났는데 아시아에도 관심이 많고 영어는 못해도 기본적으로 독일어를 할 줄 알더군요. 슬로베니아어는 독일어와 다른 언어체계인데도 이웃나라의 언어를 시골아낙네들이 잘 구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산주의 국가라 해도 매우 개방적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중국어를 일상에서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그 동안 국가운영시스템이 얼마나 폐쇄적이었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젊은이들이 술과 마약을 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고 걱정했습니다. 예전에는 꿈도 꿀 수 없던 일들이 벌어진다면서 한국은 어떠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공산주의를 수십 년간 해왔던 나라가 오스트리아나 독일에 버금가는 생활수준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빈부의 격차가 그 만큼 적었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인구가 200만 명 정도 되지만, 자신의 고유한 언어인 슬로베니아어를 씁니다. 이런 작은 나라에서 세계적인 사상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부러웠습니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화

 

이제 다시 이데올로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시장메커니즘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체제를 구성하는 지배적 관념입니다. 여기에는 돈이 모든 것의 척도이기 때문에 돈, 즉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인간대접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며, 시민들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 , 돈 하면서 돈에 혈안이 되는 것입니다. (화폐로 표상되는 돈이 인간과 사회에 얼마나 파괴적이고도 심대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역사적 사회학적 분석은 고병권 박사가 쓴 책, 『화폐, 마법의 사중주』(그린비 2005)에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돈에 대한 이러한 지배적 관념이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합니다. 시골에서 사이 좋게 잘 살던 친척들이 재개발토지보상금을 받고 나서는 서로 반목하거나 법정다툼으로 가기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양반이고, 혈육간에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습니다. 돈이 없을 때는 아무 문제없이 잘 살다가 돈이 생기자 문제가 커진 것입니다. 회사의 경영권을 두고 형제간에는 물론 부자간에도 싸움을 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라는 것이 우리의 관념 속에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의 와중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말이 전도되어 있는데도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끝)